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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Nov 30. 2017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 한동일, 『라틴어 수업』중

 그런데 '공부하는 노동자'라니요? 다들 이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안 그래도 힘든 공부가 더 처절한 고통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게 사실 아닌가요? 이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에는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큽니다. 가끔 간절히 생각합니다. 힘들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저는 햇수로 따져보면 30여 년간 공부를 해온 셈입니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편안했던 적이 없어요. 물리적인 어려움이든 심리적인 어려움이든 육체적인 고통이든 간에 늘 괴로움이 제 곁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 공부는 중도에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부하면서 맞닥뜨리는 슬럼프나 실패의 경험은 우리를 쉽게 좌절시키죠.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부에 대해서는 시작부터 완벽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고 항상 '열심히'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어요. 이 부담감 또한 우리를 쉽게 지치게 만듭니다.

 그런데 겸손한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실패의 경험에 대해 지나치게 좌절하고 비관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실패한 나'가 '나'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건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자만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한 번의 실패는 나의 수많은 부분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쉽게 좌절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겁니다. 우리는 실패했을 때 또 다른 '나'의 여집합들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그 여집합들이 잘 해낼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하죠. 이렇게 자신이 가진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나아가는 것이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요?

 공부는 단발적인 행위로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톤과 같은 장기 레이스가 그렇듯이 공부에 대한 강약 조절과 리듬 조절을 해야 합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금방 지치거나 포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가 지치지 않도록 공부를 대하는 태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때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놀았다'라고 말하며 자책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논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대부분 공부를 시작하면서 '열심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또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 그 '열심히'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단지 스스로 생각한 성과나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 정말로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절대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 하고 거기에 못 미치면 괜한 좌절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나의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공부를 항상 열심히 할 수만은 없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습니다. (...) 어떤 날은 컨디션이 좋아서 집중이 잘 되고, 그러면 목표를 넘어서는 성과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힘껏 노력했음에도 전혀 그렇지 못한 날도 있는 법입니다. 상반된 두 날은 각각 별개인 날들이 아니라 공부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생기는 리듬이고 흐름입니다. 하루의 결과가 어떻든 우리는 그날그날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중요한 건 그 모든 과정을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도록 지속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꾸준히 자기 스스로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겁니다.

 다만 무비판적으로 안일한 태도를 갖는 건 위험합니다. 자신의 공부 리듬과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가 어떤 것인지 면밀히 관찰하고 평가해야 해요. 생활 리듬은 습관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리듬을 살펴보아야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려 애써야 하죠. 좋은 습관과 리듬을 유지할 때 결과물도 좋은 법이니까요.

 공부하는 과정은 일을 해나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든 일이든 긴장만큼이나 이완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죠. 그러자면 스스로의 리듬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좋은 두뇌나 남다른 집중력보다 더 중요한 자세입니다.

 사실 인생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중 많은 문제가 우리를 괴롭히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아마도 계속 그럴 겁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것이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한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전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냥 "쌩 까"라고요. 학생들의 지친 얼굴에서 웃음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뭔가 근엄하고 엄숙하게, 혹은 진지하게 조언할 줄 알았는데, "쌩 까"라니요 그것도 선생이 말입니다.

 중요한 건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해야 해요. 그 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또한 벗어났다고 해서 다시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늘 들여다보고 구분 짓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해야 해요. 사실 학생들이나 어른들이나 잘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4세기 신학자이자 철학자로 초대 교회 교부 중 한 사람이며 교회학자입니다. (...) 그런 그가『고백록』에서 한 말 중에 제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든 소년기에는 글을 좋아하지 않았고 저에게 글공부하라고 닦달하는 어른들이 미웠습니다. 닦달을 받았던 것은 오히려 저에게 잘된 일이었지만, 어쨌든 저로서는 잘하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배우지 않았을 저였습니다. 하는 일이 비록 좋아도 억지로 하면 잘 안 하는 법입니다. (...) 저에게 배움을 강요한 그들도 제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꿰뚫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충만한 빈곤, 욕된 영광을 두고 채우지 못할 욕심을 채우려는 것 말고는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이 그런 것인데도 사람들은 종종 착각해요. 안정적인 삶, 평온한 삶이 되어야 그때 비로소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요. 이것은 착각입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필요가 없거나 늦을지도 모르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서 일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고요.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 산 사람, 살아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 있는 소망이겠지요. 존재하기에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

 이처럼 매일 출근해 일하는 노동자처럼, 공부하는 노동자는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 차곡차곡 몸이 그것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고 일정한 시간을 공부해줘야 합니다. 머리로만 공부하면 몰아서 해도 반짝하고 끝나지만 몸으로 공부하면 습관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의 생활패턴과 성향을 잘 분석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실패할 계획을 세워놓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의기소침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어느 시간에 더 집중을 잘하고 어느 시간에 집중을 못하는지, 또 어떨 때 감정적으로 쉽게 무너지는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잠은 적어도 얼마마늠은 자야 집중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와 같은 사소한 것도 알아야 합니다.

 로마 유학 중에 수업의 내용과 용어를 못 알아들었던 제 석사과정도 그렇게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실력은 착실히 쌓인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공분ㄴ 자동판매기가 아니었어요. 당장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수두룩하지만 꾸준히 체계적으로 학습량을 쌓은 두뇌는 어느 때부터 '화수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던 시간이었습니다.


 Non efficitur ut nunc studeat multum, sed postea ad effectum veniet.

 논 에피치투르 우트 눈크 스투데아트 물툼, 세드 포스테아 아드 에펙툼 베니에트.

 지금 많이 공부해서 결과가 안 나타나도, 언젠가는 나타난다.


 분명히 '아무리 공부해도 무능한 노동자'라고 수없이 자기 자신을 책망했던 시간이 머쓱해질 때가 올 겁니다. 결국 공부는 성숙을 배워가는 좋은 과정입니다. 힘들게 공부하는 과정 중에 자기 자신과의 소통을 경험할 수 있어요.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되면 자신의 한계를 보기도 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지독한 나, 열등한 나와 조우하게 되고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자신을 가엽게 여길 줄 모르는 가엾은 인간보다 더 가엾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나 자신과 소통하면서 나를 알게 되고 나를 다스리며 성숙해집니다. 자기 마음을 찬찬히 읽어내는 노력을 계속하고 그 마음을 잘 다스리는 학생들이라면 충분히 누구나 마음먹은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공부라는 노동을 통해 지식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노동자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싫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과연 어떤 노동자입니까?


 지난 2년간 공부를 하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공부하는 기간 동안 공부를 열심히 집중해서 해야 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잘 쉬고 다시 체력을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거다. 하루 몇 시간 공부를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실제로 잘 해내기 위해서는 나머지 시간을 잘 먹고, 잘 자고,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 하루나 일주일 혹은 딱 한 달까지는 공부 이외의 시간을 체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보내도 정신력으로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일 년 혹은 그 이상 동안 지속하는 것은 공부 이외의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내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작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를 바탕으로 올해는 작년보다 더 나은 일 년을 보낼 수 있었고, 멘탈적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1차적인 과정이 끝난 지금, 일 년을 과연 잘 보냈는지를 반추하면서 불안한 감정에 빠져들고 있다. 이 공부가 얼마나 더 오랜 기간 동안 지난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가장 크지만, 지난하기만 하면 다행이지, 나의 자존감을 깎아먹고 그로 인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될까봐도 두렵다.

딱 그런 시기에, 생각으로만 맴돌던 허무한 말들을 오래 공부하신 분의 앞선 경험을 통해 글로 읽으니 위안이 된다. 크게 틀어진 방향으로 오지 않았다는 확신이 든다. 이 책에서 이런 위안을 얻게 될 줄 몰랐다.

여전히 현실은 바뀐 것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불안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시기에 해야 할 일들에 집중하지 못하는 실수는 예방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잘 정리해 적어주신 경험으로 인해 이렇게 또 한 번 위로받고, 등불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감사하다.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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