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09
넛지라는 책을 읽고있다. 이번 독토에서 읽기로 한 책이다.
행동경제학이라는 말이 낯설지만,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왜 지금까지 경영학, 경제학을 위시한 소위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위화감을 느꼈는지 알게 됐다.
사회과학에서는 인간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 여긴다.
이론을 전개하는 화자만 주체이며 다른 인간은 모두 객체로 취급된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에서 인간을 '합리적 인간'으로 규정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먼저 인간을 규정한다고 하는 행위자체가 사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좀 불편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쉽게 규정지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능할까?
여러가지 예시(이론)들을 만들어 놓고, 그에 맞는 인간상이나 인간행위가 나타나야만 적용이 가능한, 이런 불완전한 많은 예시들이 과연 존재가치가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도 든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무슨생각과 행위를 하면서 사는지 알기가 어려운데다가,
그 인간이 60억이 넘는데 그들의 공통적인 특성이나 성격을 골라 한 문장, 한 이론으로 규정하는 것이,
동시대의 개개인도 모두 다 다른 존재인데 과거의 인간, 미래의 인간을 규정하고 설명하거나 예측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혹은 무모한, 어쩌면 얼마나 오만한 일일까?
다음으로는, 그 많은 인간들의 공통적인 특성,성격이 '합리적'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론들로 설명될 수 있는
한 '인간'으로서 동의하기 싫다.
합리적이라는 의미는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한'이라는 뜻이고,
사회과학에서 합리적이라는 형용사를 인간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는 경우에는
대개 '자신의 이치(익)에 합당한'이라는 의미로 해석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결국 '합리적 인간, 합리적 소비자' =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인간, 소비자'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이라는 말은 대개 경제적 이익 혹은 '이기적'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결국 사회과학이 규정하는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인 것이다.
이 말이 현실적인 규정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인정한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모든 사람들에게 교육이 권리이자 의무로 주어지고,
그것이 여전히 실질적인 공평한 권리로 자리잡지 못한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교육제도(정확히 얘기하자면 인문학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제공되는 교육제도) 이전의 인간사에서 인간을 저렇게 규정하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인간을 당연하게 저렇게 규정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고,
설사 저런 규정에 포함되지 않는 개체수가 지금까지 큰 의미없는 퍼센트 였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교사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인문학을 공부해온 학생으로서
나는 모든 인간은 다르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앞으로는 더욱 각기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야 풍요로운 아이디어와 가치가 창출될 것이고,
그것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임을 믿는다.
대학시절 내내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나의 경쟁력이라는 것을
여러 경험을 통해 점점 깨달아 왔다.
'기본만 해라'라는 말이 얼마나 모욕적인 말인지도 알게 됐다.
현재 그렇지 않고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이 쉽지 않다 할지라도
앞으로 나의 삶의 방향은 저 방향이며 그래서 지속적으로 노력해야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런 경험을 통해 모든 인간은 다르므로 하나의 특성이나 성격으로 규정지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인문학을 공부하고 교사를 준비하고 있는 나는 앞으로
미래의 학생들에게 누구도 자신을 규정짓지 못하도록 스스로 결정하고 살라고 이야기하고 가르칠거다.
그 의미는 사회과학에서 규정하는 '합리적 인간'이 되지 말라는 말과 같다.
'합리적'이라는 말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이라는 의미라면, 그리고 그것이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면
그 '이익'이 무엇인지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이익이라는 말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1차적이고 동물적인 행복 역시 행복의 한 종류이기에 폄하하고 싶지 않다.
단지,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모두의 공통적인 특성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러한 행복을 추구하기위해서 요구되는 이익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경제적 이익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이나 경영학에서도 슬슬 이익이라는 단어에 공동체적, 이타적 이라는 개념도 포함시키고 있다.
그것이 주류인지는 모르겠고, 어떤 기준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현상이고 앞으로의 사회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것과는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러한 인간들을 길러내고자 하는 교육철학이 존재한지는 이미 오래됐으며,
실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수준을 넘어서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를 논증하면 장황할테니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행복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와 같은 질문은 결국 같은 질문들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위해 명사의 강의를 찾아다니고 책을 읽고 고민하고 술집에서 논쟁하고 있다.
서점에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있는 것이 그 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합리적 인간'이 되지 말라고 애를 쓰고 있는데,
사회과학은 완벽하지도 않은 이론을 가지고 '합리적 인간'으로 사람들을 규정짓는다.
물론 이론을 주창한 이들은 '합리적 인간'을 하나의 전제로 설정한 것이겠지만,
그를 전제하고 전개되는 이론대로 만들어진 인간관,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합리적 인간'은 하나의 전제가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지향점이 되어버리기 쉽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합리적 인간'이라는 전제가
역설적이게도 그 전제로 인해 실제로 '합리적 인간'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의도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이 몰리든 몰리지 않든
'합리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덫에는 모두 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론이 어느 권력자에 의해 현실에 적용될 때,
이론을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더욱 많은 '합리적 인간'이 새로이 양성 된다.
넛지에서는 인트로에서부터 이를 말한다.
경제학을 공부했든 그렇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며 따라서 경제학자들이 제안하는 인간 모델에 들어맞는다는 생각 말이다. 경제학 서적을 들춰보면,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사고하고 IBM 컴퓨터처럼 뛰어난 기억용량을 갖고 있으며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 우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아니라 그저 호모 사피엔스일 뿐이다. 복잡한 라틴어 대신 부르기 쉽도록 여기서부터는 그러한 가상의 존재와 실제의 존재를 각각 '이콘'과 '인간'이라고 부르겠다.
이 문단을 읽을때, 몇몇은 '사람들은 적어도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라는 문장까지는 나는 아닌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 저 문장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고, 아닌사람들도 글을 끝까지 읽고나면 '이콘'이라는 개념에 초점이 맞춰져 '이콘'이 뭔데? 혹은 '이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앞선 전제를 자의반 타의반 받아들이게 된다.
(이어지는 내용역시 자신이 합리적이고 의지가 강한 '이콘'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 서술된다. 이어지는 글까지 읽고나면 '합리적 인간'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지향점이 되어버리기 쉽다.)
세상엔 경제적, 합리적, 이기적 이익외에도 다른 가치들이 많다.
돈을 최대한 많이 버는 것 혹은 최대한 적은 비용을 들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리고 이미 인간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내 목숨을 버려가면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위해서 희생한다거나,
자신의 평생의 노력을 아무런 이득이 나지 않는 행위와 교환하기도 한다.
그 대상이 자신의 꿈일수도, 공동체적 가치일수도, 어떤 지적 성취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합리적 인간이 되어야 하지만,
모두가 같은 '합리적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각자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합리적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규정하는 '합리적'은 거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