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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일 토리야마 아키라 죽음

2024년 3월 1일 토리야마 아키라 죽음

드래곤 볼, 닥터 슬럼프 작가

2024년 3월 1일, 급성경막하혈종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 3월 8일에 주간 소년 점프 공식 사이트에서 슈에이샤, 버드 스튜디오, 캡슐 코퍼레이션 도쿄의 연명으로 공표되었다.

토리야마 아키라(일본어: 鳥山明, 1955년 4월 5일~2024년 3월 1일)[1]는 일본의 만화가이며 디자이너이다. 《드래곤볼》과 《닥터 슬럼프》 등의 작가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이치현 나고야시 출신으로, 기요스시에 거주했다. 혈액형은 A형이다. 일본의 만화사 쇼가쿠칸에서 시상하는 제27회 쇼가쿠칸 만화상에서 《닥터 슬럼프》로 청소년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초기 연구와 닥터 슬럼프(1978~1983)

23세에 직장을 그만둔 후 돈이 필요했던 토리야마는 커피숍에서 무작위로 주워온 고단샤의 주간 소년 매거진에 아마추어 콘테스트에 작품을 출품하며 만화계에 입문했다. 이 대회에는 시기가 맞지 않았지만, 다른 소년 잡지인 주간 소년 점프는 매달 신인상을 받았다. 그의 편집자가 될 토리야마 가즈히코는 토리야마의 만화를 읽고 즐겼으나 원작이 아닌 스타워즈를 패러디한 것이어서 출전 자격이 없었다. 토리시마는 화가에게 전보를 보내 계속해서 만화를 그리고 보내도록 격려했다. 1978년 주간 소년 점프에 발표되었을 때 토리야마의 첫 번째 출판 작품이 된 원더 아일랜드가 탄생했다. 그러나 독자 조사에서는 꼴찌를 차지했다. 토리야마는 나중에 돈을 받고 만화를 그만둘 계획이었지만, 원더 아일랜드 2(1978) 역시 실패작이었기 때문에 그의 고집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는 1년 동안 실패한 이야기를 계속 그렸다. 그는 올해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재미있게 놀았다고 말했다. 토리시마가 여자 주인공을 그리라고 하자 토리야마는 머뭇거리며 1979년작 '토마토 더 큐티 검슈'를 만들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용기를 얻은 그는 또 다른 여성 주인공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닥터 슬럼프를 만들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된 닥터 슬럼프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토리야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변태 교수와 그의 작지만 매우 강한 로봇 아랄의 모험을 따라간다. 1981년, 닥터 슬럼프는 올해의 최고의 소년 만화 또는 소년 만화 시리즈로 토리야마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수요일 19시에 후지 TV에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토리야마의 작품은 닥터 슬럼프의 오리지널 런, 드래곤 볼과 그 속편 두 개를 통해 18년 동안 계속해서 이 시간대를 차지했고, 마침내 1999년에 닥터 슬럼프가 리부트되었다. 2008년까지 닥터 슬럼프 만화는 일본에서 3천 5백만 부 이상이 팔렸다.

닥터 슬럼프가 인기가 있었지만, 토리야마는 제작 후 약 6개월 이내에 시리즈를 끝내기를 원했다. 그러나 슈에이샤는 토리야마가 곧 그들을 위해 다른 시리즈를 시작하는 것에 동의할 경우에만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그래서 그는 토리시마와 함께 주간 소년 점프와 월간 신선 점프를 위한 몇 개의 원샷을 작업했다. 1981년, 주간 소년 점프의 독자 선택 공모전에서 45쪽 분량의 작품을 만드는 데 선정된 10명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만화 폴라 & 로이드가 1위를 차지했다. 토리야마는 1982년 대회에 다시 참가하기 위해 선발되었고 매드매틱을 제출했다. 그의 원샷 핑크는 프레시 점프 12월호에 게재되었다. 주간 소년 점프의 독자 선택 대회에 세 번째로 참가하기 위해 선발된 토리야마는 운이 나쁘게도 첫 번째 슬롯을 뽑았고 1983년의 초빗에서 새해 작업을 해야 했다. 인기가 없는 것에 화가 난 그는 다시 시도하기로 결심하고 초빛 2(1983)를 만들었다.

1982년에 공식적인 토리야마 팬클럽인 토리야마 호존카이 아키라가 설립되었다. 뉴스레터는 버드 랜드 프레스(Bird Land Press)라고 불리며 1987년에 클럽이 문을 닫을 때까지 회원들에게 보내졌다. 토리야마는 1980년대 초에 그의 이름을 딴 연극인 버드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그는 보조원을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배경 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드래곤볼과 국제적인 성공(1983~1997)[편집]

토리시마는 토리야마가 쿵후 영화를 즐겼기 때문에 쿵후 소년 만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1983년 8월호와 10월호에 출판된 2부작 드래곤 보이로 이어졌다. 그것은 무술에 능숙한 한 소년이 그녀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여행에서 공주를 호위하는 것을 따라간다. 드래곤보이는 호평을 받았고 1984년에 드래곤볼 시리즈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전에 <통푸의 모험>은 1983년 주간 소년 점프 52호에 실렸고 드래곤볼에 포함될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84년부터 1995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되었으며, 일본에서만 1억 5950만부가 팔렸다. 처음에는 모험/개그 만화로 시작했지만, 이후 격투기 시리즈로 바뀌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소년 만화"로 여겨진다." 드래곤볼은 1995년 이 잡지의 발행부수가 653만부를 기록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시리즈의 마지막에 토리야마는 자신이 만화를 끝낼 수 있도록 관계자들에게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는 11년 가까운 기간 동안 519장의 장을 제작하여 42권으로 정리하였다. 게다가, 이 만화의 성공은 다섯 편의 애니메이션 각색,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 수많은 비디오 게임, 그리고 메가 상품화로 이어졌다. 드래곤볼은 일본에서 인기가 있는 것 외에도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를 포함한 국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 세계적으로 2억 5천만부에서 3억부가 팔렸다.

토리야마는 드래곤볼을 매주 연재하면서도, 이따금씩 단발 만화를 계속 만들었다. 1986년, 호씨는 주간 소년 점프 49호에 게재되었다. 이듬해 겐노스케 도련님의 출판이 이루어졌는데, 겐노스케 도련님은 일본식 지다이게키를 배경으로 하였다. 토리야마는 1988년 주간 소년 점프 원샷 두 장을 발행했다. 1989년 13호에는 카라마루와 퍼펙트 데이가 뒤따랐다.

또한 드래곤볼의 연재 기간 동안 토리시마는 1986년 롤플레잉 비디오 게임 드래곤 퀘스트의 캐릭터 디자이너로 그를 영입했다. 아티스트는 RPG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속에 말려들었고 그것이 이미 바쁜 스케줄을 더욱 바쁘게 만들었다고 인정했지만, 완성된 게임을 즐기고 나서 함께하게 되어 기뻤다. 토리야마는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모든 작품을 계속해서 작업해왔다. 또한 슈퍼 패미컴 RPG 크로노 트리거(1995)의 캐릭터 디자이너, 플레이스테이션의 격투 게임 토벌 넘버 1(1996)과 토벌 2(1997)의 캐릭터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1988년 9월 23일 영화 코스케 & 리키마루: 콘페이 섬의 용은 토리야마가 애니메이션에 상당한 기여를 한 첫 번째 사례이다. 그는 오리지널 스토리 아이디어를 생각해냈고, 감독 아시다 도요와 각본을 공동 집필했으며, 캐릭터를 디자인했다.

2024년 3월 1일, 급성경막하혈종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 3월 8일에 주간 소년 점프 공식 사이트에서 슈에이샤, 버드 스튜디오, 캡슐 코퍼레이션 도쿄의 연명으로 공표되었다.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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