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학점을 받은 과목

일에 대한 생각

by 강병호

F학점을 받은 과목이 있었습니다. ‘타이포그래피’라는 과목이었습니다. 너무 잘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과제를 하지 못했고, 강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서 있다가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과제를 안 하더라도 출석이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교수님껜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은데 잘 안되니 못 뵙겠더라고요. 너무 잘하고 싶은 과목이었지만 오히려 F학점이 됐습니다.


저에게 서체라는 존재는 ‘너무 좋아해서 한 글자도 그리지 못하는 대상’입니다. 오늘도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너무 괴롭습니다. 너무 잘 만들고 싶은 나머지. 아무 결과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많은 양이 있어야 그중에 나은 것을 고를 수가 있을 텐데. 서체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 저에겐 꿈인데도 말입니다. 향유하지 못하고 자책만 늘어갑니다.


2016년 7월, 잘츠부르크에서 만난 한국 청년 세 명이 생각났습니다. 음악으로 세계적인 명문 사학인 모차르트 대학이라는 곳에 다니는 청년들이었는데 만나는 내내 본인들의 실력은 엉망진창이라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너무 음악을 사랑하고, 악기를 좋아하고, 그 일을 원한 나머지. 오히려 자신들의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더욱 괴로워서 그랬던 게 아닐까 반추해봅니다.


오늘은 과거에 F학점을 받았던 제 모습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계속 덤비고 싸워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혼자 궁리하지 않고 무작정 오늘까지 고민한 연구노트를 자문해주시는 분께 어설프게 정리해 보내며 “계속 보완해가며 발전시키고 지내고 있습니다! 소중한 하루 되십시오”라고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곧장 전화가 오셨고, 저녁에도 또 한 번 전화를 주셨습니다.


서체를 보아하니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이 서체를 만들기 전에 서체의 콘셉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시안으로 만들기 위한 적절한 문구도 다시 고민해봐. 그리고 이 원고체는 글줄이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도 해보고.”라는 연락을 받게 됐습니다. 너무 잘하고 싶어서 혼자 끙끙 앓기보다 이렇게라도 보내고 나니 그다음 단계를 알아가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일에 대한 생각 20220407

그럼 나는, 서체쟁이 SINCE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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