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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 O Dec 31. 2020

통제받는 삶 - 영진 이야기


"우리 모두 가슴속에 삼천 원 하나쯤은 가지고 살잖아요!" 


현금 삼천 원이 꼭 필요한 계절이 돌아왔다.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 모른다. 붕어빵, 국화빵, 꽈배기, 타코야키,땅콩빵에 계란빵. 아 요즘 땡기는 건 팔천 순대인데 삼천원이 아니라 팔천원을 가지고 다녀야 하나...... 


이맘때, 12월이 되면 가슴 속에 품어 둔 또 다른 무언가가 펄럭댄다. 사직서. 직장인이라면 현금 삼천원 뿐만이 아니라 사직서도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아간다. 인사가 발표되고, 조직 구성이 바뀌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이동하고,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사람이 차상위자로 오는 변화의 파도 속에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 언저리를 뒤적거리게 된다. 퇴사해야 하나...... 


분명히 프로 퇴사러는 아니라고 말했는데, 또 시작된 퇴사이야기. 퇴사나 이직은 단어가 주는 파국적 임팩트에도 불구하고 안도감을 준다. '내가 이 회사 아니면 다닐 곳 없을까봐? 이직하면 되지. 아니면 퇴사하던가! '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든지 플랜 B를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통제감을 갖는 것이다. 결국 내가 퇴사퇴사 노래를 부르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뗏목 하나라도 붙잡고 노저어 가고 싶은 미약한 발악과 바람이다. 




'이 사람과 내년을 어떻게 또 버티냐...' 


최근 내 마음속에 불어온 퇴사 열풍의 진원지다. 가만히 있다가도 이 생각이 스치면 하던 일을 멈추고 한숨을 쉬게 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밀어닥친다. 난 하드보일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타일바닥보다 차가운 현실에 부딪혀 이리저리 휘둘리고 뒤쫓기다가 흑백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기가 다 빨리고 어서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만 주야장천 든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도 없지만,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감정이 빨려 들어가는 걸 제어하기 힘들다. 

이 영화 속 나는 끊임없이 착취당하고 있다. '악당'의 대사는 주로 이런 것이다.


'그것밖에 안돼? 더 해야겠네. 그걸로는 모잘라.'

'어 잘했는데, 이제 그다음으로 확장을 해보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있지만, 회사에서 원하는 건 다른 일이니까 그 일도 해보도록 해.'


내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이 돼 있는데 팀장의 요구는 끝이 없다. 힘들다고 말하면 무능력자로 매도된다. 안된다고 말하면 놀고 있는 사람인냥 한량 취급을 한다. 팀장의 요구가 부당하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 한편에선 불편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정말로 내가 무능력하며, 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내 안의 자책감과 두려움.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 두 명과 싸우게 된다.  


그는 끊임없이 내 경계를 무너뜨리며 돌진해 온다. 불도저 같은 그의 돌진에 벽을 세워도 보고 도망도 가보지만 끝내 그는 내가 세워놓은 경계를 무너뜨리고 나를 짓밟고 내 얼굴이 해골 이모티콘이 될 때까지, 온 에너지를 다 빼앗기고 두 손 번쩍 들고 저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저는 이만 퇴장합니다. 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밀어붙일 것만 같다. 


상상만해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 게 무엇일까? 일이 많은 것? 팀장이 공감 따위는 밥 말아먹은 일등 꼰대라는 것? 회사라는 거대하고 막강한 조직과의 외로운 싸움에서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는 좌절감? 아니아니아니 ... 이 하드보일드 공포영화의 키포인트는 바로 '경계의 무너짐'이다. 나의 욕구, 나의 시간, 나의 의도 이 모든 것들을 무너 뜨리고 결국 자기 맘대로 나를 휘두르고 싶어 하는 것. 내가 하나를 하면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둘 셋 열까지 더 요구하는 것.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이기적인 거고, 철저히 윗사람의 입맛에 맞는 일을 해야 '훌륭한 조직인' 이라고 인정하는 것. 자연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조직의 요구 사이에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나에게, 자연인으로서의 내 가치관과 관점을 버리고 조직을 대변할 것을 요구하는 것. '나'라는 경계를 침범하여, 조직의 톱니바퀴로 물들이려고 하는 것. 


내가 이 통제의 상실에 대해 열변을 토할 때 몇몇 동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해줘~ 눈 딱 감고 해 달라는 거 해주면 되지." 나는 궁금하다. 그들은 되는데 왜 난 이게 되지 않을까? 물론 예전에 비하면 훨씬 더 내 생각을 양보하고 그 대단한 '조직'의 니즈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중이긴 하다. 그치만, 내가 바라는 건 적어도 나를 위한 최소한의 경계는 확보하는 것이다. 무조건 까라면 까라! 가 아니라, 내 생각과 욕구와 케파에 대해서 대화하고 완충할 수 있는 범퍼를 확보하는 것이다. 회사원 주제에 이 정도를 원하는 게 그리도 호강에 겨운 호소인가? 


"회사야, 나에게도 경계라는 게 있다. 그 경계를 짓밟으면 그땐 나도 깡패가 되는 거야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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