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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 O Dec 13. 2020

연결되는 삶 - 현수와 영진의 이야기


현수의 이야기


영진언니와 나는 독서모임에서 만났다.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독서모임에서 제한된 시간에 한정된 소재의 이야기만 했으니, 개인적 친분을 쌓을 일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영진언니와의 연결은 '퇴사 욕구'가 시작이었다. 당시의 나는 회사 월급이 끊기더라도 최소한의,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수입원이 될 만한 일을 찾고 싶었다.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일. 취미로 하고 있는 요가를 좀 더 욕심을 내서 지도자 자격증에 도전해 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2018년 여름이었다. '요가 지도자 자격증'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순간은 독서모임을 위해 카페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성격이 급했던 나는 도로에 빨간 신호등이 켜질 때마다 휴대폰 잠금화면을 풀었다. 신호등 불이 녹색으로 바뀌었는지를 수시로 확인하며, 급하게 'xx 요가 지도자 과정'을 검색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작은 도시라 지도자 과정이 열리는 곳이 없었다. 힘이 빠진 채로 카페에 도착했다. 

 

2주 만에 만난 사람들은 돌아가며 각자의 근황을 얘기했다. 대각선 방향에 앉아있던 영진언니가 말했다. "최근에 요가 지도자 과정을 시작해서 너무 피곤한 날들을 보냈어요.."

'엇?! 언니도 여기 사는 거 아닌가? 어디서 지도자 과정을 한다는 거지?!'

영진언니의 근황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물어보았다.

"저도 지도자 과정 관심 있어서 여기 오면서 찾아봤거든요. 하는 곳이 없던데,, 어디서 하세요?!"

" 아.. 맞아요. 여기는 없고,, 저는 ㅇㅇ에 가서 하고 있어요"

우리가 사는 지역이 아닌 30분 이상은 차를 타고 가야 하는 옆의 지역으로 간다고 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앞다투어 목구멍으로 올라오고 있었지만 독서모임의 흐름을 위해 꾹 참았다.

독서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꽤나 늦은 시간이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까 요가 지도자 과정 물어보셔서~"


우리는 이렇게 연결되었다. 영진언니는 기업의 심리상담사였고, 나는 평소 심리에 관심이 많았다. 그 후에 우리가 친해진 과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같은 해 7월의 어느 주말 저녁에는 함께 사택 앞 산책로를 걷고 있었고, 영진언니가 그 해 여름휴가를 거제도에서 정통 요가를 하며 보낼 계획이란 말에 대뜸 '나도 데려가 달라' 했다. 언니는 흔쾌히 나를 데려가 주었고, 나는 영진언니의 계획에 맞추어 하계휴가를 썼다.




왜 요가였을까.

당시 나는 내가 숨쉬기 위해 그토록 숨 막히는 회사를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회사를 다니는 것. 살아 있기 위해 매일 같은 곳으로 출퇴근을 하고 고통스럽도록 지겹고 의미 없다 느껴지는 일들에 내 에너지와 시간을 모두 쏟고 돌아오는 것. 살기 위해 이 짓을 반복하고 나중에는 이 짓을 반복하기 위해 살아있는 건가 싶은 의문에 몸서리쳐지는 것. 그런 생각들이 내도록 머릿속을 빙빙 도는 일상이 답답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다 때려치우고 새로운 시작을 할 용기는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제 딴에는 탈출구라도 마련해보자, 내가 살 길은 오직 이것 '회사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취미 겸 운동으로 그나마 하던 '요가'가 떠올랐던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내 머릿속에는 '요가'도 일종의 수행으로 그 경지가 높은 곳에 이르면 삶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하나 그런 무형의 어떤 지점, 더 이상 고통도 없고 답답함도 없는 곳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란 근거 없는 신비로움도 있었다.


한창 요가를 할 때, 우리의 관심은 '몸'이었다. 영진언니와 나는 어찌나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지, 어떤 동작을 하면 어디에 붙은 무슨 뼈가 어떻게 되는 느낌이네, 어느 근육이 어디를 어떻게 만드는 것 같네, 이 동작이 안 되는 이유는 그 동작이 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게는 있어서는 안 될 엉밑살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둥, 종아리 알이 남들보다 발달해서 그렇다는 둥,, 나름 인체공학적인 추리를 덧붙여 셀프 진단을 내리고 엉뚱한 처방을 내리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걸 쓰고 있는 지금은 요가를 하지 않는다. 요가는 나를 회사에서 탈출시켜주지도 않았고 답답한 삶에 대한 깨달음으로 데려다주지도 않았다. 다만 영진언니와 내가 연결되는 데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은 사실이다.

의외로 요가보다는 오히려 요가를 통해 시작된 영진언니와의 인연이 나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해 주었다. 삶의 확장,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와 연결, 좁아진 시선을 거두고 내 삶을 다시 여유 있게 돌아보는 것 등 우리가 이후로 함께한 시간들은 내게 이런 것들을 주었다.  영진언니는 지금도 가끔 요가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함께 발레를 한다. 요가에서 발레로 오게 된 징검다리는 역시나 몸이었다. 나보다 먼저 발레를 시작한 영진언니가 발레 세계를 내게 보여주기 시작했을 때 나는 발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건 다리를 쫙쫙 찢고 어렸을 때부터 해온 전공생들만이 할 수 있는, 나와는 거리가 먼 우아한 어떤 세계(라고 생각했으니까)였으니까. 당시에도 영진언니는 "발레는 사람이 뼈와 근육을 가동해서 만들어내는 최극단의 경지에 있는 것 같아"라는 말을 종종 했었다. 그럼에도 발레는 내게는 넘을 수 없는 어떤 선 너머에 있는 것이어서 늘 "어멋 그래요?" 하고 놀라지만 그 이상의 궁금증은 생기지 않는 세계였다. 영진언니가 발레를 시작하고 약 8개월 후, 내게도 선을 넘게 된 계기가 왔는데 '발레 메이트 페스티벌'이라는 취미 발레인들의 축제였다.


영진언니는 어느 날 내게 발레 학원에서 함께 발레수업을 하는 친구들과 발레 페스티벌 갈라 무대에 설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한 후로 언니는 주말마다 맹연습에 나섰다. 몇 달의 연습 끝에 무대에 오르게 된 날, 나는 영진언니를 응원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무대 밖에서 거의 경극 수준의 메이크업을 하고 준비 중인 언니와 잠깐 인사를 하고 관객석의 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그 순간부터 내가 왜 그리 떨리던지.. 몇 팀의 무대가 있고 난 뒤 영진언니가 속한 팀의 순서가 왔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편히 앉아있지 못하고 몸이 앞으로 자꾸만 기울게 되는 긴장감. 입사 면접 때, 내 앞사람이 들어간 후로 내 이름이 불러지기 전까지 꼼짝없이 타야 하는 그 긴장, 꼭 1등을 해야만 하는 계주 시합에서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땅! 하고 터지기 직전에 느껴지는 그 긴장감. 그와 똑같은 느낌의 긴장감을 발레의 '발'자도 모르는 내가 그곳에 앉아서 느끼고 있었다. 프로가 아닌 취미로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서 무대를 준비하고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영진언니를 포함한 그들의 열렬함과 용기가 순간 압축되어 나를 폭격했다. 얼마나 떨릴까.. 발레가 뭐길래...


갈라 무대가 끝나고 내려오는 기차에 몸을 실은 나는 선을 넘어버렸다. 다음 주엔 발레학원에 등록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요가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둔 후로 우리는 몸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자연스레 없어졌는데, 내가 영진언니와 함께 발레학원을 다니기 시작하며 우리의 몸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우리의 연결통로에 또다시 새로운 가지가 생겨났고, 발레학원에서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또다시 삶의 영역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의미 없는 지루한 삶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는데, 새로운 연결은 의외의 활력을 선물로 주었다. 

발레 자체의 매력도 장난 아니지만, 무언가를 열렬히 짝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세계에 동참하는 경험과, 그로 인해 생겨난 또 다른 연결들이 각자의 세상을 더욱 열게 하고, 나와 같지만 다른 모습으로, 다른 스타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내 시야를 환기시키는 데에 충분했다. 우리는 결국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 그 연결의 힘을 영진언니는 내게 열어주었다.


영진의 이야기


몸이 노곤해 지고 마음은 더부룩해지는 오후쯤, 현수에게서 종종 카카오톡 메시지가 온다. 새삼스럽지 않다.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같이 운동을 하고, 고양이 자랑을 하고.. 나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일과 중 많은 시간을 함께 한다.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 누구랑 먹지? 오늘은 산책을 좀 하고 싶은데 누구랑 하지? 떠올리면 가장 먼저 현수가 떠오른다. 현수는 나의 베프임에 틀림없다. 연고지가 아닌 곳에서 초중고등학교 동창 하나 없고 회사 동기도 한 명 남지 않은 인맥 허허벌판인 지역에서 어떻게 나보다 7살이나 어린 현수와 친해질 수 있었을까?

 

예전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세팅된 사람들이 아닌 애를 써 연결한 사람들과 친해지곤 했다. 지금도 내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같은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아닌 같은 관심사를 갖고 뜻이 맞고 생각이 맞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생활권을 공유하는 불특정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연결되곤 한다. 차트에 있는 탑 100곡을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듣기 보단, 내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들을 일일이 폴더 안에 넣고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를 만든다. '산책할 때 듣는 노래리스트 1' 처럼 인간관계 역시 한 땀 한땀 소중한 나의 컬렉션들이다.




우리는 두 개의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독서와 요가. 독서모임에서 만난 것이 첫 번째 공통점, 요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 두 번째 공통점. 여기까지였다면 그럭저럭 요가 자격증을 어떻게 따게 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따는 게 좋을지 조언해주고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수와 나는 세 번째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퇴사!! 


나는 프로 퇴사러 까지는 아니어도 꽤 여러 번의 퇴사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약간 '퇴사 증후군'도 있다. 한 직장을 너무 오래 다니고 있으면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퇴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해야 하나. 변화가 있어야 내가 살아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퇴사를 한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고, 직장에 남아 있으면 정체돼 있다고 느낀다. 일을 하면서도 항상 퇴사나 이직을 염두에 둔다. 언젠간 퇴사할 건데 이것저것 내가 할 수 있는 걸 배워놔야겠다. 여기서 이런 일 해보는 것도 경험이지 뭐. 지금 이 일을 해두면 나중에 이직할 때 이력서에 쓸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하면 하기 싫은 일을 감당할 동기가 약간은 더 생긴다. 


퇴사!!!!!


현수 역시 퇴사를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건 우리가 연결되기에 필요한 결정적 키워드였다. 우리는 책을 좋아한다. 우리는 요가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한다. 퇴사는 일종의 상징이다. 우리에게 퇴사는 궁지에 내몰려 해야 하는 마지막 선택이 아니야. 만일 지금 우리 삶이 불만족스럽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박차고 나갈 수 있어야 해. 그 이후의 삶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해 봐야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결정에 절대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말자. 우린 언제든지 퇴사할 수 있어! 마침표가 아닌 시작점으로 본다는 것에서 현수와 나는 연결될 수 있었다. 




나의 또 다른 연결들을 생각해본다. 지금 내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연결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찬찬히 내려 본다. 발레 모임, 연구원 모임, 요가 모임, 가족 채팅방, 회사 채팅방 등등 발레, 요가, 전공과 관련해서 나와 마음이 맞고 지지적인 사람들과의 채팅방이 대부분이다. 내가 선택하고 연결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대단히 빽이 돼줄만한 사람들도 아니고, 단 몇 개의 채팅방 뿐이지만, 이 안에서 나는 안전하고 만족스러운 연결을 유지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연결감이 나에게 중요한 이유는 나의 행복감과 직결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의 기원' 에서 작가는 인간이 행복해야 하는 건, 당위성 때문이 아닌, 행복을 느끼는 행위를 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즉, 연결감 인간을 생존에 유리하게 만든다. 이것이 과연 사냥하고 무리 지어 살아가던 선사시대에만 국한된 얘기일까? 

최근 영국에서는 외로움을 병의 일종으로 규정했다. 많은 신체적 심리적 질병이 외로움으로부터 기인한다. 우울증, 복합트라우마, 불안 등 사람을 자살까지 이끄는 수많은 질병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외로움과 싸워야 한다. 


외로움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나 무관심,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 안정의 반대말은 불안, 만족의 반대말이 불만족이라면 과연 외로움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몇 년 동안 고민해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최근에 나는 외로움의 반대말은 연결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물리적으로 함께 있던 그렇지 않던, 마음속으로 연결돼 있다는 감정이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든다. 


카카오톡 채팅방이 수십 개가 있어도, 그 어느 곳에서도 오늘 회사에서 나에게 패악을 부린 팀장 욕을 할 수가 없다면 그것이 외로움일 것이다. 바로 옆에 연인이 누워 있어도, 이 사람에게 내 고민을 얘기해도 될까? 얘기하다가 눈물이라도 나면 어떡하지?라고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마지막 채팅 일이 지난달일지라도, 이미 지난 생일을 깜박 잊고 챙겨주지 못할 지라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해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지지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마음속에 섭섭함을 풀어낼 수 있다면 나는 그들과 연결돼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나는 현수와 연결돼 있다고 느낀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책 읽는 걸 좋아하고, 요가에 관심이 있으며, 지금은 함께 발레에 빠져있고, 여유 있는 주말에 함께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고 함께 책을 읽으며 많은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걸 함께 할 수 있는 기저에는 우리가 서로를 지지하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먼저 공감해주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퇴사하고 싶다고 날마다 지겨운 노래를 불러도, 언니 내가 먼저 하고 있을테니까 언니도 빨리 해요! 라는 공감적 답가를 불러주는 현수와 연결돼 있다고 느낀다. 


나는 인간은 누구나 연결돼야 한다고 믿는다. 이 연결감을 찾아내고 외로움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수많은 노래들 가운데 심금을 울릴만한 트랙리스트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울타리가 되어줄 사람들을 찾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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