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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ong O Aug 29. 2021

행복과 불행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게 행복이란 단어는 어떤 무게도 가지지 못했다.

'행복했다'거나 '행복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라 '행복해야 한다'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행복하고 싶다'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므로. 아침에 눈 뜨면 집을 나설 준비를 해야 하고, 어제 있었던 친구와의 문제를 생각하고, 오늘 학교에 가면 만나게 될 싫은 사람을 떠올리고, 주로 스트레스였던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느라 '행복'이라는 구체적이지 않은 개념에 대해서는 머릿속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 '행복하냐'라고 물으면 확신은 없는 목소리로 '그냥.. 행복하지..?' 라거나 '그냥.. 대체적으로 행복한 것 같은데?' 하며 꼭 '그냥'으로 시작해 물음표로 끝나는 대답을 하긴 했었다. 행복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 '불행하냐'라고 물으면 그에 대해선 확실하게 '불행하진 않다'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으므로 행복하다는 뉘앙스에 가까운 답을 했다. '행복'은 몰라도 '불행'이란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이니까 내게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확실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십 대 중반이 넘어서면서 어떤 계기로 내가 추상적인 관념들에 대해, 명확하게 형태를 가지지 않는 감정 같은 것에 대해 심각하게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어떤 감정이 들었어요?"라는 질문에 당시의 상황 설명만 구구절절 늘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마치 "일 더하기 일이 얼마인가요?"라는 질문에 "하나에 하나를 더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와 같은 대답을 하던 기억.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는 그 대답이 이상한지도 몰랐다. 한창 온라인에 떠돌던 사이코패스 테스트를 하며 남몰래 내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 이후로 내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 이전보단 잘 알게 되었다.

그 후로 한동안, 사실 꽤 오랫동안 나는 '행복하다' 고 말할 수 있었다. '그냥'이나 꼬부랑 물음표 따위 붙여가며 말끝을 올리지 않고서도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이유도 말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대답을 하면서.

"아놔 진짜 스트레스받고 괴로워 죽겠어! 안 행복해! 근데 나는 안 행복한 걸 알아서 행복해."

(이 무슨,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일상의 스트레스와 우울감과 상관없이 그것들과 다른 차원의 행복이 있었다. 그 느낌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든든한 기둥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근 십 년을 행복했다. 그리고 오래오래 꾸준히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참 행복했을 테다.


요즘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자주 생각한다.


나를 불편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일상의 요소들에 대해, 견디고 싸워서 이겨내야 했던 상황과 감정들에 대해, 주로 견디고 싸우기보다는 무시, 회피, 손절하며 살아왔다. 보기 싫은 건 보기 싫으니까 놔두고, 보고 싶은 예쁜 것들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많은 것을 갑자기 한 순간에 견디며 살고 있다. '견디는 것'들이 쌓이다 보니 어느덧 '불행'에 대해 생각한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견뎌야 하는 것들이 동전처럼 쌓여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불행'하다 느끼는 걸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행복한지를 묻는 다던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행복을 묻고 다녔다.


"행복? 행복한 순간순간들이 있지.

회사에 있으면 이래 어깨 추~~~ 욱 늘어져서 일하다가 회사 문지방 나오는 순간부터 행복한 거라.

맛있는 거 먹고 신나는 거 할 때 순간순간 '아 졸라 행복하다!' 싶으면 그때가 행복한 거라 그냥"


"행복? 야! 그냥 사는 거지 뭐.. 행복하다가 안 행복하다가.."



'행복하다' 자신하던 날들에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 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행복하지 않을 거라 추측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모른다는 것 자체가 행복을 보는데 장막 같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 또한 스스로에 대해 더 예민해진 내가 둔감하던 과거와 비교해서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행복에 대해 그렇게 자신하던 나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한 거 아닐까 생각한다.  


'불행'에 대해 생각하면 불행해진다. 나도 모르는 새에 마음에 오두막 하나가 지어지는 것이다. 역시나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 오두막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이고. 어느새 나는 행복과 불행을 예민하게 저울질하다 불행의 오두막 창문에서 미세한 손짓만 나타나도 냉큼 달려가 한편에 웅크리고 앉아있게 되었다. 예전의 나처럼 '그냥'과 물음표로 행복에 답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행복을 잡지 못할까 봐, 불행과 친해지게 될까 봐 두려워서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것보다는, 행복이고 불행이고 그런 거 모르겠고 눈앞에 펼쳐진 하루 하루나 잘 살아내고 싶다고.


행복과 불행에 사로잡혀 지내온 시간이 꽤 되었다.

지금 내게 절실한 마음은 두 가지다. 행복과 불행이 아니다.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고 짧지만 행복하다 느낄 수 있는 마음 그리고 불행 같은 것이랑 좀 같이 살아도 뭐 어떻냐는 대수롭지 않은 마음. 이 두 가지면 어느 정도는 상쾌한 정신상태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자주 오두막에 들어가지만 이 어두컴컴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영 맘에 안 들 때면 내 두발로 걸어 나오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뭐, 내가 죽기라도 하는 건 아니잖아?' 생각하면서 말이다. 정말이지 죽지 않는 한 인생은 계속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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