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서 꼭 미움 당하고 유난히 놀림당하는 친구들 있지 않나. 그런 역할을 맡게 되는 친구들이 꼭 몇 명씩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어느 순간에는 그 당사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심각한 괴롭힘까진 아니었기에 기억이 흐릿한 거겠지. 흐릿한 기억들 가운데 분명히 기억나는 하나는 면으로 된 티였다. 반팔티든 맨투맨티든 후드티든. 면(Cotton)으로 된 티. 놀림당하는 친구를 보다가 그 애가 입은 면티를 의식하게 되었을 때 꼭 나는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저 면티를 저 애의 엄마가 사줬겠지. 학교 가는 길에 입혀줬겠지. 그 엄마는 애가 저 면티를 입고 학교에서 저렇게 놀림당하고 있을 줄 모르겠지. 안다면 마음 아프겠지..'.
엄마가 아이를 생각하며 샀을 면티와 그 집의 냄새가 밴 티를 입혀줬을 순간, 입히며 생각했을 학교에서의 즐거운 아이 모습까지 혼자 그려보는 것이었다. 그런 상상이 머릿속을 한번 돌고 나면 적어도 나는 그 친구를 절대로 놀릴 수 없었다. 저 친구를 놀리면, 저 친구에게 면티를 입혀준, 입혀서 학교에 보낸 엄마가 슬플 테니까.
그렇게 면티는 엄마가 엄마 대신 아이를 지켜주라고 입혀주는 보호막 같은 것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 다른 팀에 한 과장님이 계셨다. 회사를 다닌 연차가 길었고 직급도 당연히 나보다 높았다. 하지만 그는 만년과장이었다. 나름 한 팀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업무 스타일이 워낙 답답해 팀 내에서도, 다른 팀에서도 그를 업무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긁어 부스럼 만드는 말을 해서 안 그래도 안 좋은 회의 분위기를 최악으로 만든다거나, 협업이 필요한 일에서 유독 퍼포먼스가 낮아 다른 누군가가 그 낮은 퍼포먼스를 메꿔야 한다거나, 언제 몇 시까지 보내주기로 한 자료를 꼭 보내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등 업무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사람이었다. 나이와 직급을 고려해 앞에서는 그를 존중했지만 뒤에서는 사원도, 대리들도 그를 무시했다.
과장님의 업무 태도 때문에 나도 꽤 답답함이 쌓였던 어느 날 멍하니 파티션 건너의 그 과장님을 보고 있었는데, 내 옆자리 여직원이 말했다. "와이프는 어떻게 살까? 저런 사람이랑... 뭔가 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잖아... 집에 가면 좀 정상 일려나? 대리님(나) 만약에 누가 저 과장님 같은 사람 소개해준다 하면 소개팅할 수 있어요?" 나는 여전히 멍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가 두 아이의 아빠이고,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말은 통하는가.. 혼자 속으로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내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었다. 그러던 날 중 어느 날에는 퇴근 후 동기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면서 이런 얘기를 하기도 했다.
"만약에.. 누가 소개팅을 시켜준다는데, 사람은 괜찮은데 일을 정말 못한대.. 그럼 소개받을 거야?"
일을 못하는 사람이 동료들에게 어떻게 피해를 주고, 어떻게 욕을 먹게 되는지 알기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일을.. 어느 정도로 못하는데..?"
"음..... 주변 사람들이 같이 일하면 거의 항상 한숨 쉬거나 분노하거나 할 정도..?"
"그 사실을 모르고 만났고, 만나는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됐으면.... 안타깝지만 이미 좋아졌으니 어쩔 수 없겠지.... 하... 근데 첨부터 그걸 알고 있다면 소개 못 받지...."
또 다른 한 동기는 아예 처음부터 안 만나겠다고 했다. 업무 능력은 회사를 벗어나서도 그 사람의 인격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며칠 전 점심을 시켜먹으려다 배달비가 아까워서 포장을 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포장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유리창 너머로 그 과장님이 지나가는 걸 보게 되었다. 퇴사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으니 얼굴은 내가 알던 그때와 같았다. 낯설었던 모습은 과장님 옆의 와이프였다. 그들은 여느 부부들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 과장님 와이프랑 손잡고 산책 다닌대', '근무시간에 맨날 애들한테 전화해서 밥 먹었는지, 학교 잘 다녀왔는지 얼마나 애들 바본데.. 일을 안 해 그렇지' 회사 다닐 때 여기저기서 주워 들었던 그 과장님에 대한 얘기들이 떠올랐다. 나는 순간 그를 어딘가 모자란 사람처럼 생각했던 것이 좀 부끄러웠다. 내가 만약에 결혼을 했다면 나의 남편이 회사에서는 능력 쩔고 동료 직원들한테 존경받지만 가정에는 개차반인 사람보단, 과장님 같은 사람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둘 다 너무 극단적인 경우긴 하지만 그래도 선택하라면).
무엇보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건 과장님이 입고 있던 면티였다. 와이프가 남편을 생각하며 샀을 면티와 그 집의 냄새가 밴 면티를 개키고 챙겨줬을 순간, 챙기며 생각했을 회사에서의 듬직한 남편 모습까지. 그는 와이프가 면티를 챙겨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와 달리 나는 그의 부족한 업무능력을 사람됨까지 확대시켜 그를 아주 이상하고 모자라는 사람으로 만들고, 동기들과 놀리기까지 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가족을 지키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나는 지금 나 하나 지키지 못해 이렇게 글이나 쓰고 있으면서 누가 누굴.
나는 왜 이렇게 면에 약할까. 상대방의 면티를 인식하는 순간 나는 져버린다. 무장해제돼서 미운 사람이고 싫은 사람이고 없어진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소개팅에서 만난 분을 세 번째 보던 날 "좋은 분 만나길 바랄게요!" 말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날 하필 그분이 면으로 된 맨투맨티를 입고 나오는 바람에 계속 만나게 되었던 일도 있었다.
면(綿, Cotton)은 섬유 중 한 가지로 목화에서 얻어낸 솜에서 추출한 실이다. 식물성 섬유의 대표주자. 몸에 자극이 적고 흡습성이 좋다.
네이버에서 '면'을 검색해봤더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면에 취약한 이유. '자극이 적고 흡습성이 좋다' 에서 답이 나왔다. 면은 그 어떤 소재보다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준다. 자극이 없기 때문에. 옷 입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가면도 아닌 자기 본연의 모습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다. 블라우스갑옷, 셔츠갑옷, 가죽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를 취약하게 만든다. 그가 취약하다는 것을 아는 나는 더이상 그를 공격할 수 없다. 나도 같이 취약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 흡습성이 좋아 입는 사람의 집 냄새를 배고 있다. 집 냄새는 보호막이 된다. 그를 소중히 해주는 누군가가 있음을 알려준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이니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를 지키고, 그를 미워하려는 나를 지킨다.
그러니 난 죽을 때까지 면에 취약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