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하는 그리스신화
헤르메스는 다른 신들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말을 속이 시원할 정도로 대담하게 대신해주었다. 입담 좋은 이 신은 다른 이들이 차마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을 당당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재주를 타고났다.
애초에 헤르메스에게는 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하고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신들이 체면치레를 하느라 조심조심 숨기는 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밝히거나, 얄미울 정도로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뚝 떼고 거짓말을 일삼았다. 게다가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기지를 발휘해 남의 것을 슬쩍 훔쳐내는 ‘도둑질’이 특기인 말썽쟁이 신이었다. 헤르메스라는 악동을 원했던 이는 사실 제우스였다.
제우스는 뜻을 이루기 위해 아내인 헤라가 잠자는 틈에 도둑 걸음으로 살금살금 침실에서 빠져나와 그리스 중앙부에 있는 아르카디아 지방의 킬레네(Cyllene) 산속 바위동굴로 갔다. 그리고 동굴에 살던 마이아라는 여신과 동침했다.
그로부터 열 달 뒤 마이아는 출산을 했고, 헤르메스가 태어났다. 헤르메스는 제우스가 바라던 대로 슬기로운 지혜를 타고났고, 도둑질을 좋아하는 거짓말쟁이였다. 헤르메스는 어머니 마이아의 배 속에서 나온 바로 그날부터 재능을 뽐내 신들의 뒤통수를 쳤고, 아버지 제우스는 아들의 재능에 몹시 만족했다.
헤르메스는 태어나자마자 요람에서 빠져나와 바위굴 밖으로 나갔다. 동굴 밖에서는 거북이 한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있었다. 헤르메스는 거북이를 잡아 동굴로 돌아왔고, 등딱지를 떼어낸 다음 양의 장을 일곱 가닥으로 펴서 현이 일곱 줄인 리라를 뚝딱 만들어냈다. 악기가 완성되자 헤르메스는 리라를 타며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리라 반주에 맞추어 제우스가 어떻게 마이아를 사랑했고, 세상에 둘도 없이 영리한 자신 같은 아이를 낳았는지를 즉흥적으로 노래했다. 헤르메스는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고 손으로는 리라를 타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일생일대이자 최초의 도둑질 계획을 세우는 중이라 머릿속이 분주했다.
노래를 마치자 헤르메스는 리라를 요람 안에 숨겨두고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동굴에서 북쪽에 있는 올림포스 산기슭의 피에리아라는 곳까지 발길을 재촉했다.
헤르메스가 피에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한밤중으로 도둑질을 하기에 최적의 시간이었다. 피에리아에는 헤르메스의 이복형인 아폴론이 소 떼를 놓아기르는 널따란 외양간과 목장이 있었다. 헤르메스는 밤의 어둠을 틈타 소 떼 중에서 암소 쉰 마리를 훔쳐냈다.
소를 훔친 헤르메스는 소 떼를 필로스(Pylos)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 두 마리만 죽여 올림포스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고, 나머지 소를 필로스에 있던 외양간에 숨겼다.
잡은 소를 요리하기 위해 헤르메스는 불이 필요했다. 헤르메스는 절묘한 솜씨로 불을 피웠다. 월계수 나뭇가지를 널빤지 위에 놓고 톱질을 하듯 재빠르게 회전시켜 불씨를 만들어냈다.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만드는 방법은 이때 헤르메스가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갓난아기의 몸으로 위업(?)을 이룬 헤르메스는 새벽이 되기 전에 요람에 누워서는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순진한 아기의 표정으로 잠자는 시늉을 했다.
동이 트자 줄어든 소 떼를 발견한 아폴론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길길이 날뛰었다. 아폴론은 숨겨진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예언의 신이었던지라, 소를 훔쳐 간 도둑이 갓 태어난 자신의 이복동생임을 간파했다.
아폴론은 서슬 퍼런 목소리로 훔쳐 간 소를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헤르메스는 그 누구도 속일 수 없다는 아폴론 앞에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저는 보시다시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갓난쟁이라, 강보에 싸여 엄마 젖을 빨며 잠자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 큰 어른도 다루기 버거운 소를 훔치다니요. 이 포동포동하고 젖비린내 나는 다리로 는 걸음마를 할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아폴론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헤르메스를 요람에서 끌어내 멱살까지 잡고 윽박질렀다.
“이 뻔뻔한 녀석! 소를 숨겨놓은 곳까지 바로 안내하지 않으면 지옥에서도 제일 밑바닥인 타르타로스에 처박아주겠다!”
헤르메스는 유들거리며 발뺌을 했다.
“훔치지도 않은 소를 어찌 돌려드린단 말입니까? 아버지 제우스에게 심판해 달라고 부탁드려 봅시다.”
헤르메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아폴론 앞에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폴론의 으름장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헤르메스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진실을 피하며 끝까지 제 할 말을 했다. 할 말을 마친 헤르메스는 걸음마도 못한다던 말은 안중에도 없는지 성큼성큼 올림포스 산을 향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폴론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하는 수 없이 헤르메스의 뒤를 따라나섰다. 올림포스에서는 마침 신들의 연회가 열리던 참이었다. 헤르메스를 본 제우스는 한눈에 마이아가 낳은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보았다. 영리하다 못해 교활하기까지 한 표정을 보고 자신이 바라던 재능과 성질을 타고났다는 생각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제우스는 신들에게 위험을 갖추고 말했다.
“모두 아폴론이 데려온 자를 보라.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지만 오늘부터 우리의 동료가 되어 중요한 사명을 전하는 역할을 하게 될 신이다.”
헤르메스는 제우스 앞에서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저는 진실만을 말하는 자로 거짓말은 하는 방법조차 모릅니다. 거짓말을 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 체질이랄까요.”
그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제우스 앞에서도 헤르메스는 깜찍하게 거짓을 고했다.
“저는 소를 훔친 기억이 없습니다.”
너무나 능청스러운 거짓말에 제우스는 더욱 흡족했다. 아들이 보여준 기대 이상의 재능에 몹시 만족한 제우스는 급기야 입이 귀에 걸리도록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헤르메스에게 명했다.
“네가 꾀바른 녀석이라는 걸 잘 알겠다. 이제 그만 장난을 멈추고 아폴론의 소를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다 주거라.”
헤르메스는 아버지의 지엄하신 분부에 따라 아폴론을 필로스로 데려가 소 떼를 외양간에서 꺼내 돌려주었다. 헤르메스가 갓난아기의 몸으로 소를 두 마리나 잡아 요리했다는 걸 알게 된 아폴론도 깜짝 놀라 혀를 내둘렀다.
“너는 정말로 얕볼 수 없는 무서운 녀석이구나.”
하룻강아지의 배짱에 놀란 아폴론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헤르메스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아폴론을 달래기 위해 리라를 꺼내 노래를 연주하며 반주에 맞추어 즉석에서 시를 읊었다. 아폴론은 그 재주에 감탄하며 내심 리라를 탐냈다. 눈치 빠른 헤르메스는 잽싸게 아폴론에게 리라를 바쳤고, 답례로 조금 전에 돌려준 소 떼와 소몰이 채찍을 아폴론에게 받았다. 이후 헤르메스는 음악은 아폴론에게 맡기고 자신은 목축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