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사직을 '강요'당한 직장인의 패러독스에 관하여
홍차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육중한 회의용 타원형 원탁 위 낡은 노트북 화면 속 주먹구구 연구소의 소장인 박졸렬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보니 박졸렬이 너무 작고 납작하고 하찮아 보였다. 저런 사람을 미워하며 저주할 생각까지 한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홍차가 회의실 안을 가득 채운 싸구려 사장님 의자 중 그나마 엉덩이가 덜 꺼진 의자 하나를 골라 앉자마자 박졸렬은 입을 열었다.
"오늘 홍차씨가 작성한 시말서를 보고, 홍차씨의 일에 대한 태도를 알게 되었어요. 난 이제 더 이상 홍차씨랑 일을 못하겠다는 판단이 들어요. 홍차씨는 여기랑 안 맞는 거 같으니까, 사직을 권고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홍차는 박졸렬이 '당신, 이곳을 떠나라'는 말을 소리 지르지 않고, 완벽한 문장으로, 게다가 존댓말로 말한 것에 굉장히 감명받았다 (게다가 그녀의 이름도 틀리지 않고 말하다니!). 평소 그의 행실을 보자면 회의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었다. 박졸렬 보다는 조금 덜 몰상식한 누군가가 배후에 있음이 틀림없었다. 일단 상대가 재갈을 물린 개처럼 난리를 피울 수 없는 상황임을 알아차리자 홍차는 조금 더 용감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소장님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음....? 아니 내가 권고사직을... 아니 사직을... 권고... 한다고..."
예상외로 홍차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자 박졸렬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 말씀 잘 들었는데, 권고는 거절하겠습니다."
"아니... 내가! 사직을! 권고! 한다고!!! 홍차씨 잘났으니까 딴 데 가는 걸 권고한다고!!"
"네, 소장님은 권고를 하셨지만, 저는 그 권고를 거절하겠습니다."
박졸렬은 작은 모니터 안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아마 법적인 이유로 '권고'라는 단어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에 잔뜩 성이 나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홍차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희열을 느꼈다. 항상 하던대로 큰 소리로 자신보다 몸집이 작고 어린 상대를 겁주는 것이 통하지 않자 박졸렬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몰상식 다음으로 즐겨 사용하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의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그의 권위이자 권력이었다.
산타 클로스나 빅풋, 화폐를 비롯한 대부분의 상상 속 존재들이 그렇듯, 믿음이나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그들은 마법 같은 힘을 잃고 만다. 마찬가지로, 이 상황에서 박졸렬의 권위를 믿는 자는 그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에, 권위를 이용한 협박은 박졸렬이 원하는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금 주먹구구 연구소 최고 권위자인 소장의 명령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그러는 거야?! 어?!"
"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거절하는 겁니다."
홍차는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기분은 어렸을 때 술래잡기에서 술래를 따돌리며 멀찍이 뛰어갈 때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던 상쾌한 바람 같았다.
박졸렬은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가장 저급하고 졸렬한 인신공격밖에 남지 않았음을 감지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애써 화를 숨기며 홍차에게 이렇게 말했다.
"외동딸이라 공주님처럼 대접만 받고 자라서 모르나 본데, 홍차씨. 이건 이렇게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요."
홍차는 아슬아슬하게 코트 안으로 떨어지는 배드민턴 콕을 잡아채 박졸렬에게 스매시를 날렸다.
"외동딸이라서 떼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거절하는 겁니다."
홍차가 스매시를 날렸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순전히 박졸렬의 반응 때문이었다. 홍차가 이 문장을 말하는 순간 박졸렬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다 일방적으로 Zoom을 종료해버렸기 때문이다. 홍차는 그 순간 온몸에 들었던 긴장이 풀려 의자 깊숙이 주저앉았다. 그녀는 곧 알 수 없는 흥분에 휩싸였고, 그녀의 손과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밖에선 인사팀장 정준한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차씨, 소장님이 뭐라 하셨어요?"
"아, 사직을 권고하셨는데, 제가 거부한다고 말씀드렸어요."
"네...? 권고사직을... 거부하셨다고요?"
"네. 권고잖아요."
"아..."
정준한은 소장과 이야기를 더 해보겠다고 횡설수설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홍차는 잠시 멍하니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다가올 박졸렬의 잔인하고 야비한 복수를 생각하니 갑자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사무실 창문들은 모두 활짝 열리지 않는 거지 같은 구조였으므로 왜소한 홍차라도 창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몸을 던질 수 없었다. 정말 엿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그다음 일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오늘의 작은 승리를 축하하기로 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게 된 자신감을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건강을 위해 간식은 항상 집에서 가져온 견과류만 먹던 그녀가 오랜만에 탕비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미니 오레오를 꺼내 들었다. 미니 오레오를 집어 들자 자신이 거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까만 과자 가루가 이 사이에 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봉지를 먹어 치웠다. 탕비실에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쳐다보는 홍차의 입술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