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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Oct 05. 2021

잃어버린 존엄을 찾아서

졸렬한 상사 앞에서 훼손된 직장인의 존엄에 관하여

화를 참고 참고 또 참다 보면,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너무 빡이 쳐서 정신이 잠깐 나가게 된 것이다. 홍차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 측정이 불가능했던 체르노빌의 원자력 발전소 폭발처럼, 홍차의 분노는 측정계를 부숴버릴 정도로 매섭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뜨거운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주먹구구 연구소로 향하는 대리석 무늬의 합판 복도가 유독 길게 느껴진다. 홍차의 구두 소리가 벽과 바닥, 천장에 부딪쳤다. 탕탕탕탕- 메아리가 복도와 그녀의 텅 빈 머릿속에서 울리며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연구소 유리문을 열자 낯익은 먼지 냄새가 후각신경을 자극하고 그녀는 욕지기를 느꼈다.


벌써 n주 째, 홍차는 빈 책상에 앉아 텅 빈 모니터를 바라보기 위해 출근하고 있었다.


주먹구구 연구소의 소장 박졸렬은 자신의 권고사직 협박이 홍차에게는 통하지 않자 그녀를 모든 업무에서 배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준한 인사 팀장은 오랜만에 인사권자로서 홍차에게 업무 배제 사실을 알려야 했다. 우쭐하지만 조금은 어색하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정준한은 홍차를 따로 불러 냈다.


"홍차씨는 이제 업무 그만두시고 인수인계서 작성하시면 됩니다."

"... 왜요?"

"어.. 그게... 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셔가지구요..."


그런 그의 모습은 권위 있어 보이기보다는 나이 많은 형제에게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물려 입은 듯한 아이의 서글픔과 닮아 있었다. 홍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준한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가는 홍차의 뒷모습을 패배자의 그것이라 생각하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주먹구구 연구소에서는 여러 차례 이런 식으로 신입 연구원들을 쫓아낸 전적이 있었다. 한 달 이내로 일단락될 일이 리라.


만약 정준한이 자리로 돌아가는 홍차의 뒷모습이 아니라, 앞에서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있었더라면 홍차를 여느 직원과 똑같이 취급하여 쫓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절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리로 돌아가는 홍차의 얼굴엔 결의에 찬 미소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석대리가 뒷걸음질을 치며 피할 정도였다.



그날 이후 졸렬한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홍차가 자신의 자리를 지날 때마다 정준한은 혹시라도 그녀가 사직하겠노라 말하지는 않을까 희망에 찬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박졸렬 또한 연구소에 올 때마다 홍차가 자리에 있는지 곁눈질로 확인하며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참으로 졸렬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홍차는 오히려 이런 관심을 즐겼다고 한다. 즐기지 않았다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탕비실이나 화장실을 갈 때에는 꼭 정준한의 자리를 지나쳐 가곤 했고, 박졸렬이 오는 날에는 보란 듯이 텅 빈 데스크탑 스크린을 노려보며 더 꼿꼿이 앉아 있었다. 사무실에서 누군가 농담을 할 때면 누구보다 더 크게 웃었다. 그렇게 홍차는 견뎌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기에는 너무나도 긴 하루가 서서히 끝을 보고 있었다.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차를 하수구에 버리고 머그잔을 씻고 있는 차에, 오늘도 직원 여럿이 야근할 때 먹을 저녁 메뉴를 이야기하며 모여 있었다. 이부조 팀장과 대리석이 모여 큰 목소리로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기에 홍차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이부조 팀장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말했다.


"근데 소장님 오늘 너무 멋있으신 거 같지 않아요?"


홍차는 깨끗이 닦은 머그잔을 꽉 쥐었다. 속이 메스꺼워 여차하면 구토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요~ 완전 남자세요. 제가 여자라면 진짜 이상형이라고 말했을 거 같아요."


이부조 팀장의 아부에 질세라 대리석이 오두방정을 떨며 덧붙였다. 홍차는 지금 자신의 성(性)과 자신이 사랑하는 성(性)을 한 번에 욕보인 대리석의 두개골을 머그잔으로 깨부술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차마 맞장구만은 칠 수가 없어 억지로 듣지 못한 척 다른 방향을 보며 멀뚱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홍차의 분노는 마치 달궈진 돌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순식간에 웃음으로 기화되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은 이상하게도 전염성이 높다. 다들 서로 눈치를 보며 홍차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홍차가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모두 그녀가 한 마디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자신들이 경험한 이 감정의 폭발을 설명해달라는 듯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6시네요.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홍차는 구두를 쾅쾅 거리며 이부조와 대리석, 그리고 다른 직원들을 남겨두고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이부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와 대리석의 궁시렁거림이 그녀의 귓가를 울렸지만 홍차는 상관하지 않았다. 정당한 사유 없이 업무에서 배제당하고, 상사가 주도하는 직장 내 따돌림의 희생자였지만, 그래도 그녀는 저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마지막 존엄을 코 푼 휴지처럼 내다 버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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