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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Jul 09. 2021

모던 오디세이아

진정한 사랑을 찾아 선을 보다... 선을 넘다...

갑자기 여름이 되어버린 토요일.


근면 성실하고 점잖은 집안 어르신들 덕분에 홍차가 선자리에 자주 불려 나가던 때였다. 그녀가 내세울 것이라곤 아직 젊다는 것과 예쁘진 않지만 모난 구석 없이 생겼다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녀는 군소리 없이 자리에 나가곤 했다.


곧 다가올 잔인한 운명을 알지 못한 채 홍차는 에미넴의 Lose Yourself를 들으며 비장한 마음으로 압구정 로데오역에 도착했다. 기나긴 계단을 올라 5번 출구로 나와보니, 그녀와 비슷한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젊은 남녀 여럿이 쭈뼛거리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녀도 별 수 없었으므로 민망함과 묘한 연대감을 느끼며 그들 틈에 끼게 되었다.


"혹시 홍차양... 맞으신가요?"


불길한 콧소리의 남성이 홍차에게 다가와 그녀의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그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가 자신을 '양'이라고 부른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서둘러 이어폰을 빼며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는 자신을 최동탁이라 우렁차게 소개했다.


최동탁은 어쩐지 몸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삐쭉한 머리를 어떻게든 잠재우기 위해 왁스를 사용한 듯했는데, 이 때문에 머리카락이 마치 레고 인형의 가발처럼 단단하게 두개골 위에 얹혀 있는 것 같았다. 햇빛 아래 빛나는 그의 새까만 머리와 새까만 구두는 일종의 조화로운 수미상관 구조를 이루며 '최동탁'이라는 인물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는 매우 (머리와 발 끝이) 빛나는 사람이었으므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그녀와 최동탁에게 모이고 있었다.


"아, 홍차양은 음악을 좋아하시나 봐요! 무슨 음악을 들으면서 오셨습니까?"

"아 네 그냥 팝송이요ㅎㅎ 아무거나 잘 들어서요...."


자신을 홍차이라고 부르는 사람에게 에미넴과 카디비의 노래로 가득한 플레이리스트를 차마 읊어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사건을 돌이켜보며 만약 이때 음악 취향을 알렸더라면 최동탁을 물리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에서 '만약 (what if)'이란 과연 의미가 있는가와 맞먹는 논쟁거리임으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최동탁이 예약한 가까운 레스토랑에 들어서서 홍차와 동탁은 정식으로 통성명을 했다. 참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다소 참하지 못하고 살갑지 않은 그녀는 처음 인사를 나눈 후부터 자신감이 부쩍 떨어진 상태였다. 이것저것 인사치레로 묻고 나니 할 말이 없어져서 어색하게 앉아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고 있던 참이었다.


"홍차양, 주먹구구 연구소에서 일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들어가시게 된 건가요?"

"졸업하고 석사 공부 좀 하다가... 어찌어찌 (이런 엿 같은 곳에) 흘러 들어왔어요ㅎㅎ"

"우와, 석사 공부라니! 대단하십니다, 핳핳핳핳!"


동탁은 홍차의 석사 논문 주제를 물어볼 법도 하지만 끝내 묻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무려 상대의 석사 논문 주제를 물어보는 것은 십중팔구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남의 석사 논문 주제를 묻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홍차는 아주 우연히, 그리고 아주 슬프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그녀의 석사 논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자가 있었는데, 그는 배움과 학문에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녀가 재력가의 딸이라는 아주 잘못된 정보를 입수하여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홍차에게는 강남 아파트를 마음대로 구매할 만한 재력이 없었고, 이를 알아챈 순간 그자와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전의 어그러진 만남과 더불어 석사 논문을 쓸 때 겪은 정신적 스트레스에 관한 생각을 채 끝내기도 전, 최동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홍차양은 참 마르셨는데, 다이어트나 운동을 하시나요?"

"아 예? 아... 아니요. 그냥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동네 친구랑 필라테스 다니고 있어요. 동탁씨는..."

"아 저는 지난달 살이 굉장히 쪘었는데요, 그래서 살을 빼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답니다!"

"동탁씨 전혀 안 그래 보이시는데! 제 생각엔..."

"제가 식이요법에 대한 엄청 흥미로운 책을 읽었는데, 정말 많은 걸 배웠거든요!! 어디 한 번 제가 퀴즈를 내볼 테니 맞춰 보시지 않겠습니까?!! OX로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어떻게 손써볼 틈도 없이 홍차는 그렇게 두 시간가량 촘촘히 짜인 최동탁의 폭풍 같은 토크쇼에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떠나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저 넋이 나가 그녀 앞에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만 봤다. 많은 여성들처럼 그녀는 당황하면 일단 웃고 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녀가 당황하여 웃을 때마다 최동탁은 방청객의 박수를 받아 힘이 나는 진행자처럼 더욱 폭주하기 시작했다. 신진대사와 영양소, 비타민과 인간 생리에 대한 많은 상식을 배운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첫 만남에 과분한 식사를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 된 도리로 그녀는 차를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카페로 들어서는 순간 카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와 최동탁을 곁눈질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최대한 구석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분위기를 조금 진정시켜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감히 최동탁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에, 저, 홍차양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주변의 시선이 다시금 그녀와 최동탁을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홍차의 오른쪽 테이블의 여자 둘이 온 힘을 다해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녀라도 웃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홍차의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네? 사...사랑이요? 아... 글쎄요........ 동...동탁씨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아 저는 사랑이 그, 초원을 뛰노는 아기 사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핳핳.. 홍차양 혹시 아기 사자들이 꼬물거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어린것들이 꼬물거리며 서로 물기도 하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보면..."


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그것을 뛰어넘는 답변이었다. 무려 두 번이나 연속으로 머리를 가격 당한 느낌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일단 뛰노는 아기 사자들은 아닌 것 같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처럼 유동적인 현대 사회(liquid modernity)를 이야기하며 사랑마저 유동적인 액체(liquid love)로 변해가는 현상을 관찰한 바 있다. 액체 사랑이라는 개념을 확장하여 홍차는 한국 사회에서 사랑은 액체가 아니라 기체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디에나 있어 모든 거리와 골목 구석구석에서 냄새 맡을 수 있지만 만질 수 있는 실체는 없는 것...


그녀의 사색은 최동탁의 마지막 질문으로 계속될 수 없었다.


"홍차양...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어... 저는... 헨리 카빌이요... 그 슈...슈퍼맨..."


그녀는 비웃음을 무릅쓰고 매우 정직하게 이상형을 밝혔다. 그러자 최동탁은 비웃음인지 당황스러움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웃음을 터뜨렸다.


"와하하핳ㅎ 홍차양, 슈퍼맨 좋아하세요? 하하하핳ㅎ"

"그렇게 웃기신가요 ^_^ ㅎㅎ 동탁씨가 웃으시니 전 좋네요 하하.. 동탁씨 이상형은 어떻게 되시나요?"


홍차가 예의상 되물으니 동탁은 처음 만날 때 그녀에게 보여줬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전 마음씨만 고우면 됩니다."


마음씨

마음씨

마음씨...


어릴 적 할머니가 읽어주신 전래동화에서 마지막으로 접했던 어휘를 듣는 순간 홍차는 그녀 안의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 들었다. 이후 그녀와 최동탁은 긴 침묵 끝에 만남을 파하게 되었다.


유익한 시간이었지만 각자의 상황과 맞지 않는다 판단하여 홍차와 동탁은 서로 다시 만나지는 않았다. 진정한 사랑을 찾기까지, 사랑이라는 냄새의 근원을 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최동탁을 만나게 될지 그녀는 두렵고도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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