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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찻잔 Jul 23. 2021

위대한 박졸렬

산중호걸이라 하는 박졸렬의 생일날이 되어...

태초부터 존재해 온 절대 악 같은 박졸렬이지만 놀랍게도 그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날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은 불행히도 평일이었기 때문에 주먹구구 연구소의 직원 모두 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야만 했다. 석대리의 주도하에 직원들은 구색을 맞추기 위한 케이크 하나와 상품권을 준비하여 에어컨 바람을 쐬며 아주 천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박졸렬이 별일도 없는데 연구소에 행차한 모양이었다.


"어어, 일들 안 하고 다들 여기 모여있구먼! 뭐하는 짓이야 핳핳"


말로는 직원들을 매도하고 있었지만 박졸렬은 거대한 티라미수 케이크와 옆에 놓인 하얀 봉투를 보고 기분이 매우 좋은 것 같았다. 기회를 엿보던 석대리가 간사하게 손으로 케이크를 가리켰다.


"소장님 생신이셔서 이렇게 준비를 해보았습니다 헬헬"

"이게 뭐야... 상품권? 누구 돈이야? 여기 돈이면 셀프 선물 아닌가? 핳핳핳"


연구자금과 본사 돈을 어물쩍 자기 돈처럼 생각하고 있던 박졸렬의 저렴한 경제관념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었다. 몇몇 직원이 움찔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모두가 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봉투를 열어 상품권 액수를 확인했는데, 이를 보는 홍차의 낯이 다 뜨거워졌다. 다행히도 석대리가 알아서 넉넉히 넣은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박졸렬의 얼굴이 환해졌기 때문이다.


"다들 노래나 한 번 갈까요?"

"에이 왜들 그래 에이 하지 마! 하지 마아아!"


박졸렬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반대로 말하는 습성이 있었다. 하지 말라고 두 번이나 말하고 손사래까지 쳤다는 것은 '제발 해달라, 안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의미였다. 모두 기쁜 척 박수까지 쳐가며 노래를 불렀지만 중간 즈음부터 늘어진 카세트테이프같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스..릉...하는 소장님... 생신.. 추..카... 합니...다..."

"왜들 그렇게 목소리가 나갔어. 허 참."


박졸렬은 퉁퉁한 입술을 곱창같이 말아 케이크에 꽂혀 있는 초를 후-하고 불었다. 다들 축하드린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으므로 홍차도 이렇게 말했다.


"소장님, 육-씹쎄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어.. 어 그래.. 홍차씨 고마워"


홍차를 아니꼽게 보는 그였지만, 태어나서 예순 번째로 맞이하는 생일날이 주는 특별한 흥분감에 휩싸여 너그러워진 모양이었다. 졸렬한 박졸렬을 닮아 점점 졸렬해지고 있던 홍차는 그날의 작은 복수를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하면서도, 졸렬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씁쓸했다. 패기 넘치던 홍차도, 싫어하는 사람을 닮아갈 수 밖에 없는 직장인의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걸까.


박졸렬은 가장 큰 조각을 가져가 입에 정신없이 쑤셔 넣었다. 그의 입술과 이빨에 코코아 가루가 덕지덕지 붙었지만 그 누구도 박졸렬에게 닦으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다들 내심 그런 얼굴을 하고 밖에 나가 망신 좀 당해 보라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모두 조용히 먹고 빨리 자리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박졸렬은 석대리가 준비한 케이크와 봉투에 심히 감동한 듯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쓰읍- 육십 평생을 돌아보면 참 힘들었지. 남들이 부족한 것 없이 살았다고 할진 몰라도, 난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그 고생이 참 많았어... 하지만 아버지 도와주신 것 하나 없이 이 자리에 올라왔지..."


주먹구구 연구소의 이사장이 박졸렬 부친이 주도하는 서예 모임의 일원인 것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박졸렬은 자신이 자수성가한 이야기를 마음대로 지어내고 있었다. 불효자식이 따로 없었다. 늙어서까지 부족한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토록 원망스럽긴 처음이었다.


"에... 게다가 난 여기 이사장, 아니 소장이 될 생각이 추호에도 없었어요. 하도 해달라고 해달라고, 날 따라다니면서 부탁을 하니까, 정식 절차도 없이 일단 오게 된 거지, 엣헴."


주제에 이사장이 되고 싶었던 박졸렬의 억압된 욕망이 프로이트의 말실수(Freudian slip)로 나타났다. 그 순간 홍차는 모든 것을 이해한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주먹구구로 돌아가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케이크를 먹다 말고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진 홍차를 석대리가 매섭게 쏘아봤지만 이미 그녀의 웃음은 쏟아진 구슬같이 사방에 흩어진 후였다.


박졸렬은 어떻게 보아도 머리가 좋은 인물은 아니었지만, 권모술수의 세상에서 지금까지 제 한 자리를 보존해온 노련한 짐승 같은 감각으로 자신이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이는 그의 여리고 미성숙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입을 삐쭉거리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나 같은 꼰대는 이제 사실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데 말이야, 흠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석대리가 준비된 대본을 읽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부를 떨었다.


"아, 아닙니다, 소장님. 아직 젊으십니다."

"아 그래? 핳핳 아~ 아닌데~핳핳핳핳 뭐래~"


아직 젊다는 말에 박졸렬은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며 금세 기분이 풀려 백치같이 웃고 있었다. 홍차는 순간 나이가 드는 것이 두려워졌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추하게 웃는 어리석은 늙은이가 될까 봐 등골이 서늘해졌다.


바보스럽게 웃는 박졸렬의 넙적한 얼굴은 얼핏 보기엔 혐오스러웠지만, 자세히 보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홍차는 자신이 그렇게도 경멸하는 박졸렬의 어리석음과 그녀 내면에 숨겨져 있는 어두운 본성이 사실 서로 닮지는 않았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 마음속 무언가가 박졸렬의 어리석음을 닮았기 때문에 반사 작용처럼 측은지심을 느낀 것은 아닐까...


홍차의 이런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박졸렬은 자신의 육-씹세 생일을 만족스럽게 보내고 쿵쾅거리며 사라졌다. 조금 말라 붙은 물티슈로 박졸렬이 칠칠치 못하게 흘린 코코아 가루를 닦으며 홍차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끝까지, 그 누구도 박졸렬의 얼굴에 묻은 코코아 가루를 지적하지 않아서 홍차는 한숨 끝에 희미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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