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th of '33 journal <여행과 쉼>
주말은 하얗고 바스락거리는 침구를 닮아야 한다. 커다란 창가에서 잠들었다가 햇살을 못 이겨 일어나는 아침과 같이. 넘치게 여유를 부리다 보면 으레 그렇듯 머릿속은 잡념으로 가득 차고, 조깅을 하러 나간다.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녘이면 더욱 좋다. 하루 중 세상이 가장 빠르고 다채롭게 바뀌는 시간. 주말의 마법이 더해지면 세상은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 이렇게 순간을 헤아리는 주말을 꿈꾸면서도 나는 쉽게 머무르지 못하고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지내곤 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한 주의 끝, 모든 것이 한 템포 느려지는 그날이 찾아오면 세상은 쉼으로 가는 문을 열고 고요히 기다렸다.
어디에서나 한가한 주말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은 밀당이고 늘 포기하는 숙제다. 일상에선 반짝이는 계획으로 채우는 주말을 여유라 여기지만, 번번이 피로감에 가로막히곤 한다. 반면, 여행에선 시간을 낭비하는 주말을 꿈꾸는 청개구리가 되는데, 얼마 안 가 또 숨 막힐 듯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도 모든 것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은 다르지 않다. 여행자에겐 더욱더 무뎌지기 쉬운 주말이지만, 같은 풍경도 왠지 색다르게 느껴지는 그 날엔 분명 특별한 구석이 있다.
프라하의 주말 광장은 전날의 북적임을 잊은 듯 밝고 평온한 아침을 맞이한다. 해가 떠 오르는 강가에 알록달록 차양이 펼쳐지면 곧 시장이 설 시간이다. 블타바(Vltava) 강을 따라 열리는 '파머스마켓'은 프라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이벤트다. 뜨내기 여행자가 현지인의 삶을 밀접하게 관찰하기엔 시장만큼 좋은 것이 또 없다. 마켓은 일찍부터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고파는 걸 떠나,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유쾌하게 안부를 나누는 표정들만 봐도 편안하고 즐겁다. 파머스마켓에 참여하는 셀러는 모두 현지에서 잔뼈가 굵은 로컬 상인들로 그만큼 단골이 많은 것은 물론, 상품의 구색도 다양하고 믿을 만한 품질을 자랑한다. 수제 비누, 공예품, 색색이 꽃과 채소, 과일, 얼핏 보아도 신선함을 내뿜는 육류와 생선.... 유럽에선 특히 남녀노소 사랑하는 달달한 베이커리류도 빼놓을 수없다. 거기다 온통 고소한 향을 퍼뜨리는 커피와 아직 오전임에도 음주 욕구를 일으키는 와인, 길거리 음식까지. 그야말로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있는 그곳에서 프라하는 주말을 연다. 양 손 무겁게 나서는 사람들의 다음 일과를 상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공원 잔디밭에서 햇빛 샤워나, 피크닉을 하며 여유를 부리는 오후. 그 후엔 장 봐온 재료로 저마다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손님을 맞이한다. 테이블엔 싱싱한 꽃이 놓이고 끊이지 않는 웃음과 대화, 술 한 잔에 하루가 무르익는다.
일할 필요 없는 그 날은 내게도 한층 여유로운 프라하를 마주하게 했다. 비록 전날 늦잠을 자리라 다짐했지만, 별 일 없이 마음이 들떠 이불속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한 달 살기에 허락된 주말은 많아야 네 번, 그동안 나름의 여유와 쉼, 부려볼 만한 여행의 사치를 찾아 즐겼다. 이를테면, 첫 주말엔 S와 파머스마켓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시내까지 조깅을 했다. 달린 지 5분이면 온 몸에 피가 돌면서 몸이 더워지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30분 정도 조용한 거리를 가르며 도착한 파머스마켓은 시끌벅적 그야말로 시장통이다. S와 나는 카페인부터 찾았다. 마켓의 커피 부스는 모두 투고(TO-GO) 전용이지만,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자 다회용 잔에만 판매한다. 돌아와 컵을 반납하면 계산 시 추가했던 보증금을 환불해주는 방식. 이 때문에 시장을 구경하는 이들은 대부분 똑같은 하늘색 컵을 들고 있다. 멀리서 보면 흡사 강 둔치에 푸른 물결 같기도. 거기 섞여 걸으니 우리도 성큼 프라하의 삶에 깊숙이 들어온 듯 느껴진다. 작은 것에서 오는 큰 동질감. 그 때문일까. 땀이 식어가는데 강바람이 차지 않다. 혹은 뜨겁고 진한 커피, 낯선 이들 사이에도 팔짱을 끼고 바짝 붙어 걸을 동행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이리저리 밀려다니다 배가 고파진 우리는 뭘 파는지도 모른 채 가장 긴 줄에 서봤다. 사람들이 초록색 토스트를 들고 나온다. 식빵에 세 종류의 수제 페스토를 올린 단순한 음식인데, 한 입 또 한 입 먹을수록 자꾸 입맛을 당겼다. 마늘 향 알싸하고 매운 페스토, 버터를 더해 부드럽고 고소한 페스토,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풍미가 남다른 기본 페스토, 세 가지가 다 다르면서도 잘 어울린다. 따뜻한 빵을 바삭 베어 물면 푸릇한 페스토 향이 입 안에 퍼지고 뒤엔 각각 고소함과 매콤함이 장식한다. 비록 S는 취향이 아니라며 얼마 먹지 않았지만, 덕분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귀국 후 여행 후유증에 그 맛이 그리워 페스토를 직접 만들어보기까지 했는데, 물론 같을 리 없었다. 혀 끝을 통해 적힌 그 맛은 오로지 그날, 그곳만의 것. 프라하의 서늘한 4월 아침, 들뜬 주말 분위기와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여행의 설렘까지, 이 모든 재료가 빠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날 마켓을 떠나 우리는 어김없이 더 많은 것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들뜬 첫 주말은 오로지 이 것만으로도 여행 전 쌓인 권태와 무거움을 덜어주었으며 여전히 가장 먼저 프라하의 주말을 추억하게 한다. 한 박자, 조금 느리게. 눈을 감고 소란한 강가를 떠올리면 점퍼 사이로 세어들던 한기가 느껴진다. 마법처럼 혀 끝 아린 페스토 향이 퍼지고 머릿속 온통 프라하의 주말이 된다. 포근한 이불을 젖히고 나와 아침을 달리던 일, 인파 속에 깔깔대며 구경했던 파머스 마켓, 그리고 주말이라는 이름. 한동안은 그 초록의 맛을 떠올려 어느 깊숙한 구석까지 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