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플리 Jun 14. 2019

당신의 인터뷰Ⅱ #1 이재호

안드로메다에서 온 남자



창 밖 메마른 들판에 볕이 내리고 있다. 텅 빈 풍경 사이를 달려 남쪽으로 가는 기차에서 이재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조약돌처럼 표면이 매끈했지만, 결코 동글동글한 몽돌은 아니었다. 파동이 일정치 않은 물가에서 혹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디에선가 밀고 당기다 여기까지 이른 것 같았다. 표정만으론 읽히지 않는 그의 기원을 찾아 들어가 보기로 했다.







몇 달만에 다시 마주한 그는 가벼운 옷차림만큼 몸도 마음도 편안해 보였다. '요즘 좋아요, 지금 일하는 곳은 굉장히 자유로운 곳이에요.' 바로 전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큰 이유 중 하나가 대표를 동반한 회식이 충격적일 만큼 재미없었기 때문이라며 이제야 만족한다는 이야기다. 그는 현재 압구정의 한 바에서 영상 관련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린다. 막역한 친구 둘과 성수동에 마련한 주거환경도 생활을 즐겁게 하는 요소이다. '그래 봤자 딱 1년이에요. 한 녀석은 곧 결혼할 거고, 또 한 명은 일본 가서 살고 싶대요. 저는 이 동네가 좋아서 남을 계획이지만, 방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올해 서른의 이재호는 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며, 아티스트를 자칭하는 남자이다. 그렇다, 그는 예술가다.


어떻게 그는 이토록 거리낌 없이 자신을 아티스트라 말할 수 있을까. '왜 그럴 수 없죠?' 그가 진지하고 자연스럽게 반문한다. 꾸며내지 않은 진심이다. 글쎄, 정말 왜일까. 우리는 스스로 진지하게 표현하기를 주저할 때가 많다. 삶이란 어쩌면 평생 그 한 마디를 찾는 긴 여정. 그런 점에서 그는 남다른 사람이다. 우선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꾼 기질이 다분하다. 사전 질문 없는 인터뷰 내내 막힘없이 자신의 시놉시스를 풀어냈다.


'IMF로 가세가 기운 게 초등학교 때였어요.' 당시 어머니와 떨어져 살기 시작한 건 그의 삶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좋게 말하면 생각이 깊어진 계기였지만, 한동안 말수가 줄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일찍부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산 아이가 남다른 사색가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열일곱이 되고선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 해 봄, 동네 작은 극장에서 영화 <도마뱀>이 남긴 여운을 아직도 기억한다. '학창 시절 내내 영화를 즐겨봤지만, 그때야 비로소 영화가 줄곧 내게 말을 걸어왔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그리고 저도 답할 준비가 돼 있었죠.' 모두가 수능에 열을 올리는 중에 그는 영화를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을 통틀어 최고로 꼽는다는 처녀작 <쉬는 시간>도 그때 나왔다.


 

같은 지구에서 이렇게 다르게 살 수도 있구나.
그때 제 안에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이후, 영화라는 축을 중심으로 열띤 20대는 갈팡질팡 흘렀다. 적어도 남들 눈에는 그러할 거라고 그는 말했다. 졸업 후 목표한 학교는 낙방했고, 꿈을 따라 찾은 영화 현장은 생각과 너무 달랐다. 결국 스무 살에 첫 수능으로 한 대학의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되지만, 돌연 상근직으로 입대했다. 그 후, 복무기간 내내 수백 편의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영화학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으며, 빠듯하게 모은 돈으로 제대 기념 여행을 떠났다. 하필 그곳이 아르헨티나였다.


'누군가 말하길, 인천공항에서 땅을 파고 계속 내려가면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나온다고 했어요. 그만큼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이죠. 그땐 어디든 정말 멀리 가고 싶었어요.' 알다시피, 첫 해외여행으로 남미를 택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믿을 것이라곤 속성으로 배운 짧은 스페인어와 젊은 신체뿐인 한 남자가 라틴 아메리카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선 모습을 상상하니 마치 한 영화의 인트로를 보는 듯했다. 40일간의 아르헨티나, 그에게는 정말 영화와 다름없었다. '거긴 정말 모든 게 정반대였어요. 한국은 너무 추운데 거긴 여름이 한창이고, 사람들은 늘 놀고 있고. 저녁을 밤 10시부터 먹어요. 일주일에 3일 일하고 4일 놀죠. 너무 신기했어요. 같은 지구에서 이렇게 다르게 살 수도 있구나. 그때 제 안에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혼자 간직했던 상처들이 힘을 받는 걸 느꼈죠.'


돌아온 그는 바람대로 영화학교에 입학했다. 스물셋, 마침내 꿈꿔온 기회였다. 그러나 한 달만에 배울 게 없음을 느끼고 수업을 포기했다. 자, 이쯤에서 이야기가 또 한 번 궤도를 벗어날 때, 스토리는 흥미진진해지는 반면, 그의 지구력은 다소 의심스러워질 수 있다. 그러나 말해두건대 그는 지독히 한결같은 신념대로 살고 있기도 했다. 아닌 것은 과감히 놓을 줄 알았고, 신기하게도 거기선 또 다른 길이 열렸다. 매일 편집실에서 독학에 매달리던 그가 '교육다큐'를 만나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감독이 미국인 여자였는데, 에너지가 정말 좋았어요. 저보다 한 살 어린데 밝고 활기차고, 작품에 대한 피드백도 좋고. 소통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죠. 바로 다음 학기 등록금을 털어 그 팀을 도울 장비를 샀어요.' 여전히 그에겐 당시의 확신이 가득했다. 매 순간 그의 행보는 올곧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언제 꺾일지, 또 되돌아갈지 알 수 없었으나, 아무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비상업영화를 시작하면서 다른 일이 필요해졌어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바리스타, 바텐더, 또, 연합뉴스에서도 일했고... 그러다 프랑스에 간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스물아홉의 그는 가진 물건들을 모두 처분하고 기약 없이 프랑스로 떠났다. 오롯이 홀로 된 시간을 보내며 마음속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았다고 했다. 7개월 후 지난한 프랑스의 더위를 견뎌내고 귀국한 그의 손에는 한 편의 장편 시나리오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작품을 발표한 적 없는 그에게 투자가 될 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찍은 단편영화가 바로 <디트로이트 우쿨렐레, Detroit Ukulele, 2018> 그의 첫 상영작이다. 상업영화가 아니라 직접 영화관을 빌려 딱 한번 틀었고, 영화제도 자체적으로 만들어 단독 출품하는 것에 만족했다. 모든 과정을 혼자 해내야 했지만, 이로써 그는 진짜 감독이 된 셈이었다. <디트로이트 우쿨렐레>는 상영 후 바로 유투브에 공개됐다.







어떻게 보면 내 삶은 끝났어요.
서른을 기점으로.
내가 삶을 지속하는 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계속할 거예요.
하지만, 어느 순간 삶이 멈춘다면 그런 것들도 멈출 거고.




하우스 뮤직의 본고장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우쿨렐레 연주자와 하우스 뮤직 마니아가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거처도 직장도 없던 그가 영화를 만들며 지낸 곳은 바로 어머니 댁이었다. 모자는 십 수년만에 동거를 시작했다. '3개월 동안 엄마한테 해주고 싶었던 걸 다해줬어요. 집안일도, 밥 차리는 것도 다 내가 했죠. 매일 저녁을 먹은 후엔 같이 TV를 봤어요. 그땐 그저 엄마와 함께 있어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려던 찰나, 그가 말을 잇는다. '그리고 느꼈죠. 아, 다시 나가야겠다.(웃음) 충분히 좋았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저한테는 해야 할 일이 또 있으니까요. 그 시간만큼은 엄마한테 투자하고 싶었던 거고. 잘한 일이라 생각해요.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할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오다. 그 말을 몇 번 곱씹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제 자리란 더 이상 미련이 없는 현재 같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는 언젠가 세상의 빛을 보길 기다리는 장편 시나리오를  품에 안고 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 영화를 찍는 게 목표는 아니라고 했다. 아니, 그에게는 이제 어떠한 목표도 없단다. '어떻게 보면 내 삶은 끝났어요, 서른을 기점으로. 말했듯이 이제는 목표란 게 없으니까요. 내가 삶을 지속하는 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계속할 거예요. 하지만, 어느 순간 삶이 멈춘다면 그런 것들도 멈출 거고. 그러니 그걸 위해서 사는 삶은 아닌 거죠.'


말하자면 목표 없이 사는 것이 목표인 그는 꾸준히 개인들의 삶을 담은 사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제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또, 작품이 남는 것으로 하나의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당사자에게는 더 뜻깊은 일이 되겠죠. 그래서 내겐 이 작업이 뿌듯한 거고. 이런 게 사는 거고. 살아가는 한 이 뿌듯한 일을 계속하게 되지 않을까...'


역시 그의 삶은 매끄럽고 평탄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흠집이나 굴곡을 마다하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어디라도 구르고 깨지며 살아왔다. 이야기의 막바지에 문득 그가 만들었다는 영화제의 이름이 떠올랐다. <페스티발 드 안드로메다> 안드로메다에서 열리는 영화제라는 의미다. 그는 덧붙였다. 그곳에서도 누군가는 무언가를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겠냐고. 또, 그게 없다면 존재하는 것이 무의미할 것이라고도. 그럼 혹시 그곳의 누군가는 본인이 아닌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대화 말미에 나온 그의 말을 전하며 마친다.


'스스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그냥 오늘 이야기하다 보니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드네요. 서른까지 목표한 것을 하려고 움직이고 노력한, 그렇게 존재해온 나 자신에게.’





이재호의 유튜브 채널 <Zèro I>

: 늘 삶의 끝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티스트 이재호를 만날 수 있는 곳. 세련된 불어 프로필과 그의 작품들이 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NgBoB_mErQc9nornabVAOg/featured






글, 사진. 리플리


* 이야기와 글을 통해 삶의 고유색을 가만히 들여다볼 기회. <당신의 인터뷰>는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참여 신청 및 문의는 bluedanje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인터뷰 #5 이동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