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Sep 23. 2020

원룸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잘 살고 있습니까?

내가 살았던 원룸은 대학가 초입에 있었다.


그 동네는 유독 원룸이 많아 원룸촌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동네이긴 했지만, 원룸촌 내부에서도 엄연히 최고 명당은 존재하는 법. 이른바 '명당'을 가르는 조건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었다. 깨끗하고 신축인지, 물이 잘 나오고 볕은 잘 드는지, 7평이라고 써 있지만 실은 3평도 안되는 방은 아닌지 - 이런 것들은 물론이고, 새벽 늦게까지 술 마시고 떠드는 대학생들이 많이 몰려 다니는 골목은 아닌지, 그 길에서 범죄를 당한 여성들은 없는지, 지하철에서 원룸까지 오는 길에는 가로등이 제대로 잘 설치되어 있는지 - 이런 것들까지 꼼꼼하게 체크하고 나면 비로소 이곳이 명당이구나 하는 칭호를 쓸 만 한 곳이 되었다. 적어도 엄마에게는 그랬다. 철없는 스물 두 살 대학생인 나에게는 좀 더 예쁘고 큰 방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조금 낡았고 비싸더라도 더 안전해 보이는 골목에 위치한 원룸이 아무래도 엄마의 눈에는 더 찼던 모양이었다. 실제 거주자는 나였지만 지갑을 열어 매달 월세와 보증금을 내주시는 것은 엄마였으니, 나는 실상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다. 결국 입은 댓발로 나왔지만 어쩔 수 없이 엄마가 골라 준 원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내가 꿈꾼 원룸 (출처 : 핀터레스트) 

 

조금 더 작고 조금 더 낡은 원룸을 고른 덕분에 나는 방으로 친구들을 초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동네에는 조금 후미진 골목에서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그 친구들 방에 가끔 놀러가 보면 내 방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좋은 곳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를 과도하게 좋아하는 딸내미가 방에 친구들을 초대하고 밤새도록 놀 것이 걱정된 엄마의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사각형 형태로 된 원룸에는 작은 주방과 싱글 침대, 옷장, 그리고 책상 하나가 딸려 있었다. 타일이 온통 보라색 내지는 검은색으로 되어 있어서 시골 싸구려 모텔같은 느낌이 나는 화장실도 하나 딸려 있었는데, 나는 그 화장실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밤에 잘 때면 거기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화장실 문을 꼭꼭 닫아놓고 그 앞에 빨래를 널어 바리케이트를 쳤다. 방은 그래도 꽤 큰 편이었는데, 빨랫대를 펼쳐서 빨래를 널고도 바닥에 여유 공간이 있어서 그 자리에 굳이 앉은뱅이 책상을 하나 두고 밥을 먹었다. 방에 딸려 있었던 책상은 이사를 나갈 때까지 한 번도 제대로 쓴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 책상은 골칫덩어리였다. 사용도 전혀 안하는 데다가 켜켜이 먼지만 쌓여서 매주 청소를 할 때마다 불편하기만 했던 기억도 있다. 방에는 자그마한 TV도 하나 놓여 있었는데, 케이블이 접촉 불량이라 밤이면 테이프로 접촉 마디를 꽁꽁 묶어둔 채로 침대에 앉아서 TV를 보는 것이 그 당시 나의 소소한 낙이었다.


그래도 그 원룸은 첫 번째 원룸보다는 나은 조건이었다. 첫 번째 원룸은 4평도 안될 것 같은 방 안에 작은 옷장과 침대, 책상이 우겨넣어져 있었는데 바닥에 발 디딜 여유 공간도 거의 없어서 진짜 사람 하나가 겨우 살 정도의 공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방은 워낙 작았던 터라 방음이라는 게 진짜 하나도 되지 않는 곳이었다. 아침 수업이 없어 평일 낮 12시까지 방을 나가지 않고 밍기적대고 있으면 으레 옆방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커플의 신음소리가 귀를 따갑게 울리곤 했을 정도였다.


자취를 하는 내내 엄마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를 궁금해했다.


집에서도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는 애가 밖에 나가서는 제 한몸 제대로 건사하고 살 것인지, 저것이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닐런지. 주말에 집에 내려갈 때면 엄마가 으레 입버릇처럼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자취를 하는 동안 나는 일부러 엄마가 집에 오는 것을 원천 차단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엄마의 잔소리가 두려워서였다.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침대며 옷장이며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드라이기는 콘센트에 꽂은 채로 그대로 내버려 두고, 냉장고는 텅텅 비어 물 외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내 방의 상태를 보여주기가 싫었다. 그걸 본 엄마는 분명히 옷을 하나하나 치워주면서 깨끗하게 하고 살지 못하는 나에게 무어라고 한참을 잔소리하실 게 뻔했으니까.


출처: vogue

 


"아이고, 내가 너 이러고 살 줄 알았다, 알았어."


혼자 나와 살면서 엄마가 내 자취방을 들여다 본 건 이삿날 뿐이었다. 집이 서울 근교였던 만큼 이삿짐 차까지는 필요가 없어, 소소하게 꾸린 짐을 들고 엄마의 차를 이용해 이사를 했다. 사실 이사라고 부를 정도로 살림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부피 큰 이불과 옷가지가 가득 든 이민가방을 제외하고는, 무거운 전공책과 그릇 몇 벌, 수저, 프라이팬 등이 이삿짐의 전부였다. 그 와중에 작은 사치를 부려 가져갔던 커피포트는 생각보다 잘 써먹었다. 사실 방에서 지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는데, 그럼에도 오후 수업이 있는 날 느지막이 일어나 내려 마시는 커피 한 잔이 가끔 그렇게 사치스럽게 좋을 수가 없었다. 3천 원 하는 커피를 하루 두 세잔씩 사먹기도 조금 빠듯해지는 월말에는 더더욱 그 사치가 너무나도 감사했다.


자취하는 동안 가끔 집에 내려갔을 때 나를 맞아주는 엄마의 따뜻한 밥상이 좋았다.


주말에 집에 내려가면 엄마는 나를 그 동안 못 먹고 야윈 사람 취급했다. 주말 밥상 반찬 선택은 늘 내 차지였다. 목요일 저녁이나 금요일 아침이 되면 엄마는 이번 주말에도 올거지? 하면서 주말에 뭘 먹고 싶은지 - 주말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가끔 시험 공부가 바쁘거나 대학원 연구실에서 실험이 있어서 못 내려가는 주에는 엄마의 세상 시무룩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원래 가족이라는 게 오랜만에 보면 세상 애틋해지는 건지, 아니면 한 주 내내 학교 앞 쪼끄만 자취방에서 고생했을 딸내미가 안쓰러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의 자식 사랑이 대단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출처: 디자인하우스

 

자취방을 떠나온 지 벌써 4년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가끔 열 평도 안 되던 그 방에서 살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 안에서 살던 시절이 그리운 것은 아니다. 그 조그마한 방에서 살면서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으니까. 한번은 새벽 세 시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가 문을 마구 두드리고 열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그 당시 내 원룸은 진짜 원룸이어서, 방문 바로 옆에 침대를 두고 자야만 했는데, 새벽녘 누군가가 번호키를 계속 입력하고 미친듯이 문을 잡아당기는 소리를 내서 잠에서 깼다. 한참을 그렇게 방문을 열려고 시도하던 남자는 문이 열리지 않자 뭐라뭐라 소리를 내더니, 내 자취방 문 앞에 주저앉아 코를 골면서 자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밤중 자다 말고 잠에서 깨서 공포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나한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소리라도 내면 문 밖의 남자가 또다시 문을 열려고 시도할까봐, 아니면 그 남자가 갑자기 도망이라도 가 버려서 잡을 수도 없게 될까봐, 나는 이불 속에서 숨을 죽이고 경찰에 그를 신고했다. 마침 근처에서 순찰을 돌던 분들이 금방 와주셨는데, 그를 흔들어 깨우고 훈방 조치했다. 그들 딴엔 나를 안심시킨다고, 같은 학교 학생인 것 같으니 걱정 마시고 주무시라는 말도 덧붙였던 것 같다. 학생이 친구 집에서 자려고 왔는데 집을 잘못 찾아서 여기를 두드렸다나. 딱히 주거침입을 했다고 보기에도 어려워서 그랬던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당시만 해도 그런 일들에 조금은 관대했던 때라, 경찰도 자취방 건물주도 그냥 아주 가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 달라, 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이다.


출처: 핀터레스트(banggood.com)


원룸은 기본적으로
범죄에 취약한 거주공간이다.


작년 5월 일어났던 '신림동 원룸 사건', 그리고 그와 유사한 다양한 모방범죄들. 원룸이 밀집한 지역에서 혼자 사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범죄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범죄로부터 안전한 원룸을 찾겠다고 조금 넓은 골목으로 나오면, 범죄보다 당장 더 살떨리게 무서운 월세와 보증금의 압박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골목이 범죄로부터 청정한 지역은 또 아니다. 배달음식이라도 시켜먹을라 치면, 배달원이 혼자 사는 여성의 원룸에 침입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수많은 뉴스가 떠올라서 주문하기도 주저하게 된다. 1층에 경비원이 없고, 주로 조그만 골목에 원룸촌이 밀집해 있는 데다가 늦은 시간대에는 골목을 오가는 인파도 뚝 끊겨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 나는 심지어 대학가 근처에서 자취를 했었음에도, 내 머릿속에 있는 원룸촌은 그런 느낌이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아서, 서울 근교에 부모님이 거주하셔서, 결국 지금 그 거주공간을 떠나 4인 가구가 함께 거주하면서도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부모님이 지방에 거주하셨더라면? 서울에서 번듯한 아파트에 내가 혼자 살 만한 곳을 구하진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또다시 오피스텔이나 원룸으로 들어갔을 지도 모르겠다.


거주공간은 그만큼 중요하다


거주공간은 단순히 내가 자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거주공간은 나의 생명과 직결되는 이슈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질과 직결된 이슈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꿈꾸는 미래와 직결된 문제일수도 있다. 부동산 이슈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그 문제 안에 다양한 층위의 이슈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부동산과 관련된 전문가는 아니다. 훨씬 더 대단한 전문가들이 더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고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런 곳에서 살아본 나의 경험을 비추어 보았을 때, 우리 모두는 조금 더 나은 곳에서 살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가치를 떠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은 생각은 물론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이 고작 5평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이라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꿈꿀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까탈스러운 내가 좋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