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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Oct 28. 2015

남자에게 자동차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인연은 늘 소중하다. 그것이 기쁜 인연이든 슬픈 인연이든. 다만 후자가 더 뚜렷이 기억된다는 것이 아이러니일 뿐이다.


스무 살부터 어려워진 집안 형편덕에 가난을 벗 삼아 십 년의 세월을 잡초처럼 버텨냈더니 서른이 되어있었다. '서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보다는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라는 생각이었다. 고된 시간 악착같이 버텨온 학업을 언제 그랬냐는  포기하고 돈을 벌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뛰어든 금융회사에서 형을 만났다. 첫인상을 잊을 수 없다. 동양인 같지 않은 검은 피부에 도톰한 입술, 곱슬머리. 흑인인 줄 알았다. 그는 미국에서 MBA를 마치고 재무 관련 일을 하 결혼하고 귀국해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입사한지 한 달쯤 된 신입사원과 후보자로 우리는 만났다. 첫 회사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고객의 재무상태에 맞게 목표를 설정하여 최적의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힘든 영업이었다. 금융의 'ㄱ'자도 모르던 시절. 형은 첫 금융 선생이었다. 이론으로만 알던 투자에 대해 어깨너머로 배웠고 끈질기게 물어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부분 처음 접하던 것들이라 신기했고 배움자체가 행복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창피할 정도로 어설펐지만 그때의 열정은 뜨거웠다.

많이 아는 것과 이를 활용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었다. 간절함의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형의 과외(?)를 스펀지처럼 흡수한 후 수퍼루키로 성장했다. 집안 사정이 나처럼 어렵지 않았던 형은 서두르지 않았고 몇 걸음 뒤에서 걸었다. 몇 개월째 챔피언을 달성해 화려한 관심을 끌었지만 가계 부채를 상환하느라 여전히 빈 지갑이다. 마지막 주 정도 되면 영업비가 부족해 사무실에서 여유로운 척 웹서핑을 하거나 책을 보곤 했다. 그럴 때면 그가 말을 걸어왔다.

"주열아. 활동 안 나가니?"

"에이. 형, 난 사업목표 초과 달성했잖아..."

"그래 잘났다. 이놈아. 하하"

이십 분쯤 지났을까. 모니터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바지 주머니에 불쑥하고 지폐 뭉치를 쥔 손이 들어왔다.

"뭐야?"

"챔피언님께서 낼모레 월급 나오면 이자쳐서 갚으셔~"

하고는 다급히 부르는 내 목소릴 뒤로 하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여유로운 척 했지만 속사정을 아는 형이 영업비를 빌려준 것이었다. 그도 부잣집 아들은 아니었다. 중산층 정도였을까? 게다가 신혼 초기라 여유가 있었을 리 없다. 아 현금서비스를 받아줬을게다. 너무 고마워서 마지막 날까지 내달렸고  다시 챔피언이 됐다. 부담스럽게도 스포트라이트는 내 차지였다. 눈물 나게 고마웠고  온기 덕분에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입사 6개월 만에 최연소, 최단기 부지점장이 되었다. 고맙게도 형은 우리 팀의 선임이 되어주었다. 다시 일 년이 지났고, 금융업계 최연소, 최단기 지점장이 되었다. 다시 형은 지점의 선임 부지점장이 되어주었다. 매일 16시간씩 일했고, 빨간 날도 없었지만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3개월 연속 지점이 챔피언 행진을 이어갔다. 월말이 윤달이어서 2월 29일이었다. 마감회식을 시작했고 11시 정도 공식적인 자리를 마무리했다. 거나하게 취한 우린, 마중나온 형수가 셈을 낼만큼 사내끼리 진한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기분 좋게 더운물에 몸을 담그려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주열 씨. 00 씨가 00 씨가... 아.. 나 어떡해.. 아.. 주열 씨.. 나.. 어떡해.. 우리 00 씨 어떡해..."


용인 쪽에 살던 형은 국도변에 잠시 차를 세우고 소변을 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취해서였는지 2차선 도로 반대편으로 걸어가서 용변을 보고, 형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 했다. 순간 왼쪽에서 달려오던 덤프트럭이 보였고 형수는 허겁지겁 피하라고 손을 흔들었는데, 형은 바보같이 더 크게 손을 흔들며 응답했 한다. 그리고는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도 형수가 보는 앞에서...

군복무 시절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상을 치르러 다녀온 통영을 제외하면 처음 경험하는 초지인의 장례였다. 93세로 주무시다 돌아가신 할머 장례는 마을의 큰 잔치였다. 할머니와 많은 추억을 공유하지 못해, 통곡을 하던 사촌들 사이에서 겸연쩍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35세에 신혼이었던 젊은 남편의 장례은, 특 6년간의 유학생활로 인간관계가 축소된 형의 빈소는, 찬바람이 부는 것처럼 서늘했다. 어떻게 3일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예상대로 음주상태였다. 삼류 드라마에 나오는 단역배우처럼 죄송하다며 연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던 피의자와 아내의 잔상이 실루엣처럼 남아있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가난한 분들이었다. 다행히 사망보험금이 3억이라는 이야기도 들렸다. 웃고 있는 영정사진은 참기 힘들었다. 형이 좋아했던 말보로 레드에 불을 붙여 끊임없이 피워놓았다.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사무실로부터 오분거리에 살았던 예나 지금이나 운전을 좋아하지 않 그때까지 뚜벅이였다.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한 것으로 알려져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여전히 빚이 남아있 차를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주열아. 나중에 혹시 외제차를 살일이 생기면 말야. 우리 처남한테 좀 사주라. 우리 처남이 너랑 동갑인데. 너랑은 너무 달라서 어찌나 철이 없는지 몰라. 근데 이 녀석이 일본에서 중고차를 수입하거든. 그냥 형 얼굴 봐서 나중에 꼭 이용해줘. 알았지? 그리고 차는 벤츠인 거 알지? 넌 아직 차에 관심이 없지만 너한테는 컨버터블이 어울릴 거 같아. 우리 챔피언님~"


오랜만에 형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이 말했던 처남이 사무실 앞으로 뚜껑 열린 SLK-350을 몰고 왔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처남을 태우고 테헤란로를 달렸다.


월 200만 원의 할부를 내면서 2인승 컨버터블로 오너 드라이버의 삶을 시작한 건 자동차를 최고의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뭇 남성들의 로망과는 거리가 먼 이유였다. 너무 불편해서 오래 함께하지 못했지만 지금도 여느 컨버터블을 볼 때면 형의 얼굴이 떠오른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의 영역이다. 지금은 아주 드물지만... 아주, 아주 가끔은 형의 유쾌한 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순간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그때의 형보다 네 살이나 나이를 먹었다. 형은 없던 아들도 낳았다. 지긋지긋했던 빚도 모두 청산했고 금융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모든 과정을 함께했어야 했다. 두고두고 고마운 마음을 받아줬어야 했다.


슬픔은 기쁨보다 뚜렷하다. 반면 눈물나듯 아리기에 름다운 순간도 있다.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있던 그대로 담아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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