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Dec 26. 2015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고 싶다?

바이오테크시대

'제레미 리프킨'의 작품을 보면 방대한 자료에 놀란다. 전공도 아닌데 이런 디테일이 가능할 수 있다니 신기하다.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집필진이 행하는 '공동작업'이 답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그의 팀이 주제로 선정된 분야의 모든 자료를 섭렵하고, 이를 바탕으로 통찰력과 필력이 뛰어난 본인이 글을 쓰는 방식이다. 덕분에 언제나 믿고 볼 수 있다. 빅데이터 시대의 창작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을 하는 방식으로 변할 것이란 의견에 동의한다. 


유전자공학에 대한 올바른 접근. 유전자 관련 산업의 이해관계. 
과학자의 욕심 혹은 양심. 우생학의 역사.


1998년 작품이라는 게 놀랍다. 동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우석 사태'가 지속적으로 오버랩된다.



작년 개봉된 영화 '제보자'는 황우석 사태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당시의 맹목적인, 광신적인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배경은 '황우석 사태'지만 주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내부고발자'에 대한 이야기다. 극 중에 난치병 환자를 둔 수많은 가족들이 '내부고발자'를 향해 비난을 퍼붓는 장면이 나온다. 황우석 박사가 환자들을 어루만지며 꼭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에선 마치 세례를 주는 신처럼 보인다.


나의 아이가 불치병에 걸렸다면 어떨까?
혹은 아이가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누구든 내 아이의, 내 가족의 병만 치유할 수 있다면 신으로라도 모시고 싶을 것이다. 그 상황에 있지 않은 이가 상상하는 것은,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사자의 간절함과 유전자 산업을 주도하는 거대 기업들의 이윤추구가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황우석 사태는 양치기 소년의 교훈을 하나 더 얹은 것뿐이다.

우리는 이미 상당 부분 작가의 경고대로 살고 있다. 만약 태어나기 전 자녀의 능력을 개선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런 유전자적 치료(?)를 선택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은.

핵심은 어디까지를 질병으로 보느냐에 있다. 태어나자마자 숨도 못 쉬고 고통만 받다가 바로 사망할 것이 확실하다면, 사전에 알 수 있다면 낙태를 비난할 수 있을까. 반면 아이가 키가 작을 것 같다면. 아이가 못생길 것 같다면. 아이가 머리가 안 좋을 것 같다면. 이렇게 확장해 나가는 것이 '우생학'의 시작이 아닌가. 우월한 것이 좋은 것이니 우월한 것만을 남기자. 


열등한 존재는 없애버리자!


'스파르타'가 떠오르지 않는가. 영화 '300'을 보면서 열광했던 적이 있다. 역사에 문외한이었기에 영화를 비판했던 이들을 역으로 비난했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페르시아'에 대한 폄하 및 역사 왜곡은 차치하자. '우생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스파르타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 나름 유전자가 좋은 계급에 속한다면 문제의식이 없을 수 있다. 심지어 속으론 좋아할지 모른다.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아이가 태어나면 산에서 굴리고 살아남은 이들만 거둘 수 있는가. 결혼도 유전적으로 좋은(?) 계급끼리 하고, 심지어 남편이 나이가 들어 좋은 아이를 가질 수 없다 판단되면 젊은 남자와 동침하게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국가가 부강해지면 도대체 어떤 이들이, 어떤 계층이 행복해지는 것인가. 유전자가 계급인 사회를 상상해보라. 

미국은 우생학의 원조였다. 이름 대면 알만한 많은 지식인들이 우생학에 열광했다. 우생학에 빠진 히틀러가 이를 몸소(?) 시연하여 공포를 보여주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우생학은 건재했다. 

유전공학에 대한 확대를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전공학을 접자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천천히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나비효과를 상상해야 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유전공학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똘레랑스'다. 어찌 보면 내 아이가 조금 부족해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부모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제한적이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학원에 보내고 본인들의 미래보다는 아이의 사교육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 부담으로 자살하는 아이들이 가장 많은 곳이 우리나라다. 몇 년째 부동의 1위다. 요즘 애들이 약해빠져서 그런 거라고 어른 행세할 것인가. 우리는 전쟁을 겪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만 보고 달려서 경제대국을 이뤘다고 자랑할 것인가. 

아이들은 여전히 전쟁 속에 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각개전투로 내 아이만을 최고로 키우겠다는 단기적인 전술이 아니다. 다소 공부를 못해도, 운동을 못해도, 어느 것이든 잘 못해도, 그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것이다. 차별받지 않기에 자존감을 지키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 아이와 남의 아이가 함께 행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어른들은 연대해야 한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똘레랑스'가 존재하는 사회를 만든다면 멋진 유전자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진 않아도 어느정도 줄어들지 않을까.

우리 아이가 실수하거나 실패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웹툰 <송곳>



작품은 수많은 질문을 하지만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좋은 책은 좋은 질문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부자들'이 겁 없이 취하길 바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