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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May 23. 2016

아이와 나

육아 간증

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동물 역시다. 무엇인가를 더 좋아하는 것은 최소한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마음의 결과다. 여기서 절반이란 양이거나 질이거나, 둘의 미묘한 섞임이다.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천사의 미소로 방긋하거나 가슴을 맞대고 온기를 전하는 순간을 싫어하긴 어렵다. 하루에도 몇 번씩 똥기저귀를 갈고, 헤집어 놓은 음식을 치우고, 자아를 찾아가며 점점 떼쓰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처절한 일이다. 감내하는 것이다. 즐긴다면 이상한 일이다. 한 개인이 소유한 자유, 그 시간과 공간을 대화가 통하지 않는 누군가와 나누는 것은 일방적인 희생이 필요할 따름이다. 가장 긴 시간 육아가 필요한 포유류는 그 존재만으로 모든 주변 환경을 변화시킨다. 때론 거침없이 파괴한다. 육아 경험 없는 이들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말. 장기간 반려동물과 함께한 적 없이 동물을 좋아한다는 말.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강아지를 좋아하세요?
사람을 좋아합니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요.


이런 식이었다.

많은 사람과 모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질척거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길 원했다. 적절한 강도와 빈도를 유지하면 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결혼을 바라지 않았고 아이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운명처럼 아내를 만났다.

100일 만에 프러포즈를 하고 169일 만에 결혼했다. 어떤 영화의 주인공처럼 백팩 backpack하나 짊어지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한 남자는 사법적 구속을 스스로 선택했다. 축가를 불러준 지인에게 사랑스러운 고양이도 분양받아 '집사'라는 타이틀도 거머 줬다.



이 모든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만큼 드라마틱한 호르몬의 힘으로, 축복만이 가득했다. 이전 라이프 스타일을 돌아보며, 왜 일찍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아쉬워했다.


2014년 5월 15일 스승의 날.

천사가 내려왔다. 진정한 아이러니는 천사가 찾아왔는데 지옥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육아를 통해 얻는 수많은 교감, 그로 인한 행복을 묘사한다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 아쉽게도 '시'는 짧고 일상은 어떤 장편 대하드라마보다 길다. 한 번의 다툼도 없던 영화 같은 신혼은 산산이 부서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어김없이 '파레토의 법칙'이 존재했다. 20%의 행복과 80%의 고난이 있었다.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현실을 살아내는 것. 기쁨으로 시작해 고통의 나락으로 향하는 것만 같았다. 띄엄띄엄 주어지는 20%의 모르핀에 의지하면서 말이다.


2016년 5월 15일 스승의 날.

두 번째 생일파티를 마친 후 잠든 아들의 작은 손을 살포시 쥔다. 쌕쌕거리며 내쉬는 따사로운 호흡을 받으며 입 맞춘다.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두려워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도 아들이 좋아할 만한 아빠가 되고 싶은 마음이 출발선이었다. 육아를 통한 변화로 배운 가장 큰 깨달음은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누구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고, 역으로 모두가 특별하다는 뜻이었다. 오직 물질의 기준으로는 주로 승자의 위치에서 살았더니, 단순한 이치를 깨닫는데 무려 40년이 걸렸다. 이를 통한 각성이 없었다면 여전히 멋들어진 가면 속을 온통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 채우고 살았을 것이다. 아닌척했지만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을 계몽하려 들고, 유난히 발달한 이빨로 나만의 논리를 설복시켰을 것이다. 젊은 날 이룬 어설픈 성공에 도취된 채 살았을 것이다. 한때 잘 나갔던 운동선수가 평생 과거에 사로잡혀 오직 덧칠만 하며 늙어가듯 말이다.


연애초 대학 친구의 집들이에 아내와 함께 갔다. 한참 술자리가 이어지는데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근데 난 지난 15년 동안 이 녀석이 화내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어. 나도 못 봤어. 성격이야 진짜 짱이지.


‘그래. 타고난 인격이 그렇지. 난 특별하잖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들하고 있군.’


결혼 후 한참 지나서야 아내가 입을 열었다. 그때 너무 이상했다고. 어떻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냐고. 심각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웃어넘겼다. 그때까지 아내와도 다툰 적이 없었다. 육아가 시작되면서 부딪히기 시작했다. 아빠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육아에서 엄마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스트레스를 공감했기에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아빠 역시 초보였다. 다툼은 잦아졌다. 이전까지 적게 화내고 둥글게 살아온 것은 타고난 성향도 있었겠지만 캐주얼 casual 한 관계에 치중했기 때문이었다.


SNS를 보면 너무 행복해 보여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기쁨은 나누면 좀 더 커진다. 두배인지는 모르겠다. 슬픔은 나누면 줄어드는가. 줄지 않는다. 서로 힘들어진다. 때문에 슬픔은 절친들과 독점하는 편이 낫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슈를 공론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SNS에 기록하는 순간은 20%의 모르핀으로 부족할 때 자신에게 남용해주는 처방전이었다. 누군가 보고 행복을 느낀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었다. 육아 이전엔 기쁨의 일부만 올렸고, 이후엔 행복한 순간만 올렸다. 빈도는 점점 줄어갔다.


완벽한 삶, 영화 같은 삶을 꿈꿨다. 적절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맞이한 해피엔딩. 그 주인공으로 살고 싶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나. 인생은 고작 2시간 남짓의 드라마가 아니다. 일상은 머피와 함께한다. 왜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머피의 법칙'이 환영받진 못해도 공감되는 이유다. 삶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일상은 질척임의 연속이다.


완벽주의, 엘리트주의에 빠져 사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본인의 결정이 옳다는 확신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됐던 서울대생의 자살을 보면 공감이 된다. 가난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계가 보였던 모양이다.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너무나 아까운 청춘이 소멸됐다. 아마도 스무 해 동안 그의 선택은 늘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었을 것이다. 주변인들은 주로 칭찬했을 것이고 본인에 대한 확신은 강화됐을 것이다. '요즘 애들은 유약하다.' 접근은 명백한 오류다. 자살을 택한 것은 약자의 비관보다 본인의 결정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지만 고래의 춤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그 아이를 보며 과거를 반추했다. 천만다행으로 그리 높은 벽은 없었다. 넘을만한 고개였고 오히려 그럴싸한 이야기가 됐다. 만약 도전이 불가능해 보이는 산이 겹겹이 가로막혀 있었다면 과정을 즐기며 지속할 수 있었을까. 머리 속으로 계산해보고 확신하며 포기했을 수도 있다. 너무 안타까운 그 학생처럼.


육아를 통해 처음 경험한 첩첩산중, 사면초가의 압박은 능숙하게 제압해온 극기克己의 고통과는 달랐다. 언제나 나만 잘하면 됐다. 때문에 가장 깊은 사이, 가족 관계가 불행해지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 힘들었다. 극단적인 상상으로 이어졌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렸다. 만약 조금만 더 늦게 깨달았다면 상상은 현실이 됐을 것이다. 평생 선택에 대해 망설임도 후회도 없는 완벽주의자, 초 엘리트라 믿어왔으니.


행복의 기준은 풍요가 아닌 결핍에 있다.

다만 풍요와 결핍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경우에만 그렇다. 선택지가 결핍뿐이라는 것은 구조적 비극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oblige는 좀 더 강한 '도덕적' 강제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주장해왔는데 정작 가장 친밀한 가족관계에서의 결핍은 참지 못했다. 부부든, 부자든 언제나 행복할 순 없다. 부족함을 느낄수록 개선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한 계단을 오르면 잠시의 풍요 뒤 또 다른 결핍이 찾아온다. 만약 어떤 부분에서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후에 다가올 행복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돌인 아들이 어른스럽게 행동하거나 육아 전쟁 중인 아내가 연애시절처럼 너그럽길 바란 것은 얼마나 어색한 일이었나. 15년 동안 절친들에게 한 번도 화내지 않았던 것처럼.


어떤 삶도 특별할 것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더 많은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벽주의로 무장한 사이에 보이는 틈, 그것은 여유였다. 삶은 치열한 전쟁이지만 그 여유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육아라는 전쟁을 빨리 끝내버리고 나면 영원한 행복이 도래할까. 8할의 쾌락과 2할의 고난으로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기만 할까. 100%의 행복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8개의 결핍과 2개의 풍요가 적절하단 중간평가를 내렸다. 결핍은 곧 불행을 의미하지 않지만 과정만으로 쾌감을 지속하는 것도 무리다. 2할의 풍요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8할의 결핍으로 향하면 된다. 풍요와 결핍의 대상은 다양할수록 좋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2년 전 맞이한 것은 일개 천사가 아닌, 뮤즈 Muse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스승, 나의 뮤즈가 일깨워 준 결핍의 지혜는 부족함을 바라보는 성급한 마음을 다스리게 해줬다. 유명 희극 배우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무엇이든 조급해하지 않는 것. 조금 더 먼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 그 여유를 배우고 있다.


아이는 훌쩍 커버렸다. 부족한 아빠는 발맞추기는커녕 먼발치에서 겨우 쫓아가는 중이다. 더 이상 이 거리가 답답하지 않다. 조금 더 떨어질 수도 있고 가까워질 때도 있을 것이다. 아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거리에서 스치고 말 짧은 인연이 아니라면 매끄럽기만을 바랄 수 없다. 사랑은 통제불능과 헛발질의 연속이다. 더 많이 아파하고 더 질척거려도 된다. 일방적인 폭력만 아니라면 더 뜨거워져야 한다. 두려운 것은 높은 음역대의 언성, 필 feel 충만한 다툼이 아니라, 상대를 무시하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가족은 완벽한 이해 없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다. Family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삶의 전부는 사랑이고,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My Muse, An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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