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방콕
시작부터 개운치 않았다. 부모님과의 여행에서 난 언제나 완벽한 기획자이자 가이드, 짐꾼이자 두 분 사이에 벌어질 다툼의 불씨를 애초에 꺼뜨릴 평화유지군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불길함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우린 방콕에 가면 안 됐다.
엄마는 먼 사촌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다는 사이판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 했다. 난 강냉이를 한 손 가득 움켜쥐고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다들 괌으로 여행을 가지, 사이판은 딱히 볼 게 없던데?” 그러자 엄마는 “그냥 휴양하러 가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는 듯, 항상 이야기로만 들었던 사촌이 사는 나라에 가보고 싶은 것 같았다.
나 역시 부모님과 떠나는 여행이 꼭 어디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따뜻한 곳에서 물놀이도 하고 밤에는 (체력이 된다면) 반딧불투어 같은 걸 해도 좋겠다 싶었다. 하루는 날을 잡아 호핑투어도 가야지. 여행이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던 것은 MBTI 극 P인 내가 추앙하는 J처럼,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고 호텔도 예약을 마쳤을 때였다.
”근데 네 아빠가 심심하지 않을까? 태국 같은 곳은 어때? “ 엄마가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태국? 갑자기?” 뭔 생뚱맞은 이야기인가 싶었다. 엄마는 엄마 친구가 엄마 친구의 딸과 보름간 다녀온 태국 일주 이야기를 방앗간 기계에서 곡물이 쏟아지듯 우수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렇게 여행은 사이판에서 방콕으로 변경됐다.
그날은 방콕에 도착한 두 번째 날이었다. 오전엔 로컬 시장에 다녀왔고, 마트에서 요깃거리 할 음식과 망고를 잔뜩 샀던 것 같다. 호텔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야외수영장으로 가 물장구를 쳤다. 수년 째 수영을 배우는 엄마는 세계선수권 대회에 출전한 듯 각종 유형으로 어푸어푸 물살을 가로질렀다. 어릴 적 동네 개천에서 물에 좀 떴다는 아빠는 일명 개헤엄을 치며 즐거워했다. 그 행복은 잠시 뿐, 이윽고 내 눈앞에 슬로모션으로 아빠가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그저 어느 햇빛 따사로운 낮에 여유롭게 수영을 하려던 것뿐인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이튿날, 태국의 한 대형병원에 도착했을 땐 세련된 흰 벽에서 옅게 피어나는 차가운 소독약 냄새가 겹겹이 쌓여가는 나의 슬픔과 피로에 섞여 가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아빠를 쫓아다니며 검사를 하고, 의사를 만나고, 치료를 받고, 재활실에서 목발로 걷는 법을 안내받고, 서울로 가져갈 서류들을 떼고, 수납을 마치는 동안 검고 푸른 점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어떻게 공항에 가서 출국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왔는지, 한국에 와선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하고 치료와 검사를 반복해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는 방콕의 비읍도 꺼낼 수 없는, 태국은 금지어가 되었다. 엄마의 기억엔 태국 여행은 없다고 한다. 그렇게 나의 홀리데이(Holiday)는 홀리-쒯-데이(Holly-shit-day)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