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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캇 Mar 20. 2016

눈 내리는 아침의 몽중산책

한겨울 오타루를 걷다.



아침부터 창 밖으로 꽤 굵은 눈발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있으니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신선한 풋사과 향 같은 아침 향기, 생생한 현실 속에서 느끼는 꽉 찬 비현실감. 
그것은 한 겨울 홋카이도에서 첫 아침을 맞이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겪는 감회일 것이다. 


아침 공기는 저녁보다 가벼웠다. 집 안에서도 느낄 수 있는 북해도의 청명함, 폐와 정신이 맑게 정화되는 느낌이 좋다.  


일본가옥을 조금 손보아 운영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는 화장실, 샤워실, 세면실을 잇는 복도가 나무 바닥이다. 바닥은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는 매력적이지만 난방이 되지 않아 실내에서도 쌀쌀한 기운이 확 느껴진다. 맨발로 걷기에는 바닥이 너무 차가워 게스트들에게 제공되는 실내화 착용이 필수다. 

 



주인아저씨의 캐리커쳐.  정말 똑같이 생겼다.



숙소의 고양이 '모모짱'은 뒷다리와 꼬리만 내놓은 채 천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주인아저씨께서는 주방 사용법만 간단히 알려주시고 자리를 뜨셨다. 숙소에 구비된 비품들은 여느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내가 꼭 현지인이 된 느낌이다.


300엔을 주고 사 먹는 숙소의 아침식사는 간단한 토스트 빵과 잼, 버터가 전부다. 나는 동생과 마주 앉아 소꿉놀이하듯 빵을 굽고, 잼을 발라먹으며 배를 채웠다. 식사를 마친 후 그릇을 깨끗이 씻어 널고 나갈 채비를 한다. 내가 싫어하는 '추위'이지 '겨울' 그 자체는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홋카이도에서의 겨울 여행은 어느 정도 고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걷기 힘들 만큼 두텁게 쌓인 눈. 겹겹 싸맨 손발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 여기에 시야를 흐리는 폭설까지 가세하면 자칫 여행길이 아닌 고행길이 되는 수가 있다. 우리는 옷에 접착할 수 있는 핫팩을 등과 아랫배에 붙이고, 장갑과 신발 안에도 미니 핫팩을 넣었다. 두꺼운 기모 레깅스와 바지를 껴입고도 길고 두꺼운 겨울 스커트를 이불처럼 그 위에 덧입었다. 여기에 눈이 가득 쌓인 곳에서도 불편함 없이 걸을 수 있는 긴 부츠를 신으니 하루 종일 바깥에 있을 용기가 났다.  








밤부터 이어진 폭설은  점점 심해져 눈을 뜨면 눈 앞이 뽀얗게 흐려졌다. 

폭설이 시야를 가리는 골목길에서는 달려오는 자동차를 조심해야 한다. 한겨울 홋카이도의 자동차들은 사륜구동에 스노우 타이어까지 갖춘 경우가 많아 웬만한 눈길에서도 쌩쌩 달린다. 



신선한 눈은 무척 폭신폭신했다. 뽀독뽀독 밟히는 느낌이 어찌나 좋던지. 방심하고 빨리 걷다 그만 중심을 잃고 눈이 가득 쌓인 길가로 고꾸라져버렸다. 찬 기운이 느껴졌지만 눈이 쿠션처럼 폭신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고 폭신한 세상. 그래서 넘어져도 웃음이 터져나오는 곳. 

이렇게 바닥이 푹신푹신하다면 온 세상을 겁 없이 뛰어다닐 수 있을 텐데. 넘어져도 아프지 않고 피 흘릴 염려 없으니 넘어지는 일이 두려울 게 무언가. 넘어진다고 옷에 때가 타는 것도 아닌걸!


겨울 홋카이도는 그래서 더 특별하다.

무중력 세상처럼, 현실 너머의 세상처럼, 내가 살던 곳과는 조금 다른 감각으로 와 닿는 세상이다.








오타루의 관광중심지라 불리는 사카이마치혼도리에는 쏟아붓는 눈폭탄에 아랑곳없이 계획된 일정을 소화하려 애쓰는 여행객이 많았다. 흩날리는 눈발이 정신사나워 두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지경이지만, 거리 위에서는 일본어가 들려오고, 중국어가 들려오고, 간간이 한국어도 들려왔다. 


눈은 모든 것을 제 빛깔 아래 가두어버렸고 깜깜한 밤거리처럼 새하얀 아침거리는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우산을 쓰고 눈을 막아보지만 눈은 계속해서 우산 안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그렇다고 우산을 쓰지 않으면 곧 눈사람이 된다. 이런 눈 앞에서는 기념사진 한 장 찍어 남기는 것조차 쉽지 않다. 








동생은 어제 봐 둔 크리스털 목걸이를 구입하러 상점으로 향했다. 
푸른빛을 발하는 눈 결정체 모양의 크리스털 펜던트는 겨울여행 기념품으로 손색이 없어 나도 함께 구입해 간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게는 굳게 닫혀있었다. 헛걸음이다. 


이상하게 이런 식으로 갖지 못한 것들의 여운은 길게 남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더욱 또렷해지고 어느 순간 강렬해져서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다. 여행 중에는 뭐든 망설여진다면 그 자리에서 깊게 고민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여행 중에 만나는 것들은 그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영영 잡을 수 없는 것이 되기 쉽다. 
장소는 시시각각 변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려주는 것은 별로 없다.  










항구 근처라 어물을 파는 가게들도 있다. 이런 날씨에도 점원들은 일찍부터 가게를 열고 손님이 들어올지 모를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오랜 시간 지켜봐야 하는 건 그칠 줄 모르는 하얀 눈이고, 사람들이 몰리는 건 유명한 제과점이나 식당이었다.








이방인들의 얼굴 위에서는 눈길을 걷는 고달픔보다 와락와락 펑펑 쏟아져내리는 눈에 대한 경이로움이 더 크게 읽힌다. 그들 사이를 무표정한 얼굴로 노련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현지인이다. 

이곳 사람들은 매년 쏟아지는 폭설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을 테지.








오타루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서정적인 화면 연출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이와이 슌지 감독이 오타루를 선택했던 이유는 뭘까? 

일부 가로등을 가스등으로 사용하고 있을 만큼 현대화에 물들지 않은 소박함, 조용하고 순박한 지역 사람들, 유리 공예관과 오르골당으로 대표되는 아기자기한 지역 정서, 일본의 북쪽 끝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변방의 느낌. 이 모든 것들이 영화 속 첫사랑의 전설에 어울리는 배경으로 선택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날로그적인 정서는 오타루의 매력을 이루는 큰 축이다.
그리고 이러한 매력을 대표하고 있는 카페 <기타이치홀>이 있다. 현대에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 '기름 램프'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매일 아침이면 직원이 직접 램프 하나하나에 불을 점화한다. 매일 아침 8시 45분부터 9시 20분 사이에는 램프에 불을 붙이는 작업을 직접 볼 수 있다고 한다.


창고를 개조한 목조식 카페 내부에는 바깥의 빛이 거의 들지 않는다. 여러 테이블에 손님이 있었지만 내부는 무척 조용했다. 모두가 몸을 사려 조심하는 일본 특유의 공공예절 덕분이다.

흰 눈이 휘몰아치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카페 안은 그윽한 어둠과 167개의 고전적인 석유램프가 발하는 침착한 불빛 덕분에 로맨틱하기 그지없다. 치렁치렁하지 않고 과묵한 느낌이다. 목조로 꾸며진 높은 천장 덕에 유럽의 성당처럼 근엄한 기운도 감돈다.



카페 건물은 1901년에 설립된 유리제조업체 <아사하라가라스(原硝子)>를 전신으로 삼은 <기타이치가라스(北一硝子)>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오타루 역사적 기념물 21호(小樽市歴史的建造物第21号)>로 지정되어 있다. <기타이치가라스>는 유리, 석유램프, 어업용 부표 등을 제조하여 판매하던 업체였으나, 전기 보급과 어업 쇠퇴, 플라스틱 보급에 밀리자 관광사업으로 전환했다. 

현대화된 지금도 1세기를 넘긴 기업으로 남아 유리와 조명을 지역특산물로 제작해 판매하고, 유리공예품 전시관을 통해 그 가치를 관광객들에게 소개한다. 심지어 석유램프도 포기하지 않고 카페에서 사용하고 있다.








짙은 색의 나무벽, 단정하고 단단한 테이블과 의자는 화려한 맛은 없어도 멋스럽다. 

카페에 앉아있으면서 구식의 것을 세련되게 보존하는 노력을 느꼈다. 과거의 빛과 그림자가 이 카페 안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전설처럼 존재한다. 


앞으로도 오타루의 일본인들은 이 아날로그적인 카페를 보존하려 노력할 것이다. 70-80년대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해오던 명동의 한 다방이 특색 없는 현대식 카페로 리모델링되었을 때 느낀 허탈함을 떠올리면, 첫 모습 그대로 지키며 장수하는 외국의 카페들이 참 부럽다. 외양적 화려함을 쫓느라 시간에 의해 축적된 가치는 쉬이 버리는 우리의 태도가 안타깝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것을 추억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카페를 나서 다시 눈이 퍼붓는 바깥 길로 나선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눈이 쏟아지는 길을 걷는 자체가 몽중산책이었다.

눈 내리는 사카이마치혼도리는 여행하는 그 시점부터 이미 아슴푸레한 기억으로 새겨진다.


눈이 녹아 사라진 계절에 이 거리를 다시 찾는다면 아마 상당 부분을 기억에서 또렷이 더듬지 못할 것이다. 

눈에 의해 지워진 거리를 꿈꾸듯 걸었던 나에게 눈이 사라진 세계의 또렷한 풍경은 - 아직 본 적 없는 풍경일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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