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리 공원, 홋카이도청 구본청사
오타루에서 삿포로까지 완행열차를 탔다. 서울의 1호선 열차와 흡사한 객차 안은 겨울철 관광객이 많은 탓에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객차 내부의 부산함이 잦아든다.
이 열차가 낯선 이방인들은 눈빛에서부터 티가 난다. 절제하려 애쓰지만 완전히 숨기지 못한 호기심.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는 눈동자들.
내 맞은편에는 커플로 보이는 중년의 백인 아저씨와 일본 여성, 어린 딸과 여행하는 중국인 부부가 앉았다.
한동안 낯설게 이어지던 객차 안의 정적을 깬 건 건너편에 앉은 백인 아저씨였다. 우리에겐 묵직한 렌즈가 달린 풀프레임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내 카메라 가방에는 'PRESS'라는 단어가 영어/아랍어 이중표기로 적혀 있었는데 아저씨는 거기에 큰 호기심을 보였다.
"당신은 기자인가요?"
"아니요. 이건 그냥 가방 장식이에요."
"나는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 때문에 종종 기자로 오해받곤 해요. 내 외모가 저널리스트처럼 생겨서 그런가 봐요. 하하!"
일본어에도 능통한 그는 내 옆에 앉은 지역 어르신과도 다정다감하게 대화를 나눴다. 건너편 중국인 가족은 입은 꾹 다물고 있어도 관심 어린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아저씨의 활약 덕에 삿포로를 향해 달려가는 열차 안은 창가에 몽글몽글 서린 김만큼이나 훈훈한 유대감으로 꽉 찬다.
나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서도 편안한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아저씨의 능력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종종 기자로 오해받는 것은 지적인 외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낯선 사람들과 심리적 장벽을 금세 허물고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밝고 자신감 있는 성격이 그를 진짜 기자처럼 보이게 했을 테니까.
완행열차는 오타루와 삿포로 사이에 늘어선 크고 작은 역에 모두 정차했지만 중간에 내리고 타는 사람이 몇 없더니 종점인 삿포로에 도착하자 우르르 내렸다. 나는 삿포로역에서 고등학교 동창인 서박사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홀로 기다리고 있을 서박사를 떠올리며 마음이 급해진 나는 서둘러 내리다 손에 쥐고 있던 아이폰을 열차 입구에서 놓쳐버렸다.
"으아악!!!"
조금만 다른 각도로 떨궜더라면 아이폰이 플랫폼과 열차 사이 틈으로 빠졌을 것이다.
아이폰이 떨어지는 순간, 플랫폼에 서 있던 역무원 아저씨도 함께 놀랐다. 나보다 재빠르게 허리를 굽여 아이폰을 주워 건네는 역무원 아저씨 얼굴엔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이 가득하다. 미소 띤 얼굴로 경쾌한 일본어로 말을 건네 오시는 걸 봐선 나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나는 감사한 마음에 허리 숙여 힘껏 인사한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삿포로역에서 서박사를 만났다. 일본에서 오랜 친구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실현될 줄이야!
서박사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만난 나의 오랜 친구다. 전공과 학번은 다르지만 같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했다.
반 년간 도쿄에서 연구원 일을 하고 있던 서박사의 홋카이도 대학 출장 일정이 나의 여행 일정과 알맞게 겹쳤고, 우리는 이 낯설고 흥미진진한 북방의 도시에서 시간이 되는 만큼 동행하기로 했다.
도쿄에서 상경한 서박사의 옷차림은 온난한 도쿄 날씨에나 알맞게 얇았다. 기어이 핫팩으로 외투 안을 무장시키고서야 길을 나섰다.
삿포로 역 주변에는 열선이 깔린 도로가 많다. 어딘지 모르게 대도시의 면모가 느껴졌다.
홋카이도의 겨울 축제 중 대표 격인 삿포로 유키마츠리가 한창인 오도리 공원 주변의 인파는 상당했다.
동생은 눈이 깨끗이 치워진 거리 위에서 느껴지는 도시다운 멋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유키마츠리가 열린 오도리 공원에서 펼쳐진 다양한 행사 중에 단연 시선을 끄는 건 가파른 눈 비탈에서 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스노보더들이다.
일 년 열두 달 중 3분의 1이 겨울인 홋카이도.
가뜩이나 긴 겨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내리는 폭설로 봄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지역에서 겨울을 누구보다 재미있게 보내는 방법은 바로 동계스포츠를 즐기는 것 아니겠는가!
전광판 위로 보더들의 프로필이 소개되고, 아찔하게 높은 눈 비탈 꼭대기에 한껏 멋을 낸 보더들이 한 명씩 등장한다. 여성 보더들이다. 심지어 나이가 어리지도 않다.
아래서 바라보는 내 눈엔 그저 두렵도록 가파른 곳에서 오차 없는 감각으로 자신의 몸과 움직임에 대한 직관을 신뢰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넘어짐과 연습의 시간이 있었을까.
어느새 나는 그녀들이 멋지게 하늘을 가르며 뛰어내리기를 응원하는 한 명의 관중이 되어있었다.
높이, 힘차게, 당신의 열정을 보여주세요!
잠시 후 우리는 홋카이도청 구본청사로 향했다.
삿포로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구본청사 건물은 미국 메릴랜드주 의사당을 모방해 1888년 세운 건물로 미국 네오바로크 양식이다. 한 눈에 보아도 세련된 서구풍의 붉은 벽돌 건물은 흰 눈 쌓인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크리스마스 동화 삽화 속 저택처럼 보인다.
구본청사 정문을 들어선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해준 건 지금껏 살면서 보았던 눈사람 중에 가장 거대했던 초대형 눈사람이었다.
* 저 눈사람 뒤편에는 자유롭게 올라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유년시절 이후 자신의 몸보다 큰 눈사람을 만날 일이 없었던 우리들은 이 눈사람 앞에서 다시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유년의 겨울에 느꼈던 정서와 맞닿은 행복감.
한 없이 인자한 표정의 이 눈사람은 찹쌀떡 두 개를 쌓아 올린 형상이라 '모찌 선생'이라는 별명을 내 멋대로 붙여주었다.
'눈의 계절'을 맞은 삿포로의 일상은 내가 지금껏 한국 땅에서 살아오며 보내온 겨울의 일상과는 달랐다.
열선이 깔린 삿포로 역 근처와 번화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두텁게 얼어붙은 눈길이다.
눈을 치우는 사람들의 노고를 비웃듯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펑펑 눈.
당장 급하지 않은 것들은 겨우내 눈 속에 방치되기도 한다.
미끄럽지 않도록 손을 써놓은 것 같아도 미끄러져 넘어지는 시민을 두어 번 목격했다. 서박사는 출장 중인 홋카이도 대학 캠퍼스 안이 미끄러운 빙판길이라 어쩔 수 없이 신발 바닥에 붙이는 하이젠을 샀다고 했다.
삿포로 사람들이 눈과 함께 살아간다는 건 그들의 직업마저도 눈과 얽혀있음을 의미한다.
제설용품 업체들, 제설 작업을 하는 사람들, 눈을 이용해 축제를 기획하고 홍보하고 꾸미는 사람들, 설국에 어울리는 먹거리와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 외국인들까지 찾아오게 만드는 훌륭한 스키장들.
눈은 장애물인 동시에 자원이 된다.
삿포로는 인구 규모로는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190만 명가량이 거주한다. 연평균 6미터에 가까운 적설량을 보이는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별 탈 없이 살아가려면 제설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 道路除雪費 - 도로제설비
* 雪対策費 - 눈 대책비
* 億 - 억(엔)
* 平成27年度 - 2015년 (일본식 연도표기)
* 자료출처: http://www.city.sapporo.jp/kensetsu/yuki/jigyou/budget.html (일본어)
삿포로시에서 발표한 2015년 삿포로 제설에 들어간 예산은 187억 940만 엔이니 정말 억! 소리가 난다.
겨울을 네 달로 잡고 계산해도 하루 동안 제설을 위해 들어가는 돈이 1.5억 엔(15억 원가량)이 넘는 것이다.
홋카이도의 다른 도시들은 삿포로처럼 많은 비용을 들이지는 않겠지만 이것까지 모두까지 합하면 엄청난 금액이 산출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메이징 삿포로, 어메이징 홋카이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