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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캇 Feb 29. 2016

홋카이도의 긴 겨울은 언제나 설일이다.

한 겨울 오타루의 눈길을 검은 때가 타지 않는다.



추운 날씨를 유독 싫어하는 내가 마음 설레며 찾게 되는 겨울의 섬. 한 겨울의 홋카이도(北海道).

일본의 최북단에 위치한 거대한 섬. 바다 건너로 러시아와 이어지는 동아시아의 끝자락.

간결한 풍경, 청아한 빛, 말끔한 공기, 소박한 사람들이 있는 곳.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홋카이도 설경의 독특한 분위기가 나를 한 겨울 속으로 제 발로 찾아가게끔 만든다.


홋카이도의  총면적은 83,453㎢ 로 남한 면적 99,373㎢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넓은 지역을 짧은 일정으로 다 보는 건 불가능하지만 교통편이 훌륭하게 갖춰진 몇 개의 주요 지역은 단기간에 둘러볼 수는 있다.


보고 싶은 지역 중 단기 여행자에게 수월한 세 곳(오타루, 하코다테, 삿포로)을 추렸다. 

그래도 동선이 짧지 않아 돈을 안 쓰며 여행을 하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오타루와 삿포로는 근접해있지만, 하코다테는 남쪽으로 300km가량 떨어져 있다. 3박 4일 일정에 이 거리를 왕복하는 것이 마뜩잖아 삿포로 in - 하코다테 out이 가능한 대한항공 티켓을 구입했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과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사를 통해 구입한 비행기 티켓은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좌석이 지정되어 있어 멀찍이 떨어져 앉아야 했다. 내 좌측엔 40대로 보이는 친절한 한국 남성분, 우측에는 한국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본인 아주머니 두 분이 앉았다.





인천발 비행기가 세 시간 남짓을 날아 신치토세 공항 근처에 이른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하자 새하얗고 낯선 풍경들이 작은 창 밖으로 펼쳐진다. 

중요한 영화의 예고편을 보듯 눈을 크게 뜨고 창 너머를 훔쳐보기 바쁜 나의 마음이 설렘에 들뜬다.


착륙까지 남은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가 차츰 작아지는데, 비행기 동체는 좌우로 뒤뚱뒤뚱 위태롭게 흔들린다. 돌풍이 불어서란다. 창 밖으로 보이는 치토세 공항의 하늘은 화창하건만, 이 커다란 비행기를 맥도 못 추게 만드는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결국, 착륙을 1분 남기고 급상승한 비행기는 치토세 공항 상공을 십여 분 방황하다, 다시 한 번 돌풍에 흔들리며 위태롭게 착륙했다.







오타루로 향하는 기차의 창밖으로 끊임없이 새하얀 설경이 펼쳐진다. 

순결한 생크림처럼 쌓여있는 눈을 보며 동생은 생크림 나라를 여행하는 판타지를 이야기했다. 


기차 안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빛은 따사로워 장갑 위로 피어난 보풀마저도 다정해 보이게 만든다. 그 빛은 여행자의 몸속까지 고여들어 타국에 막 도착한 긴장감을 녹여낸다. 모든 게 금세 편안해진다. 동생은 의자에 기대앉아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어른 옆에 꼭 붙은 꼬마들과 나른해 보이는 어른들 사이에서 낯선 체취에 차츰 익숙해지는 사이, 순박한 얼굴의 일본인 할아버지가 나의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을 건네 오신다.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할아버지께서 내 카메라를 반가워하는 이유를 이해할 길이 없다. 나만 귀머거리, 주변의 일본인들만 자초지종을 이해할 것이다. 


짧은 단어로 기워낸 일본어와 바디랭귀지로 '저는 한국인이에요. 일본어를 못 한답니다. 스미마셍!'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외국인임을 이해한 할아버지는 무척 미안해하신다. '괜찮습니다. 같이 대화해드리지 못하는 제가 더 죄송하죠.'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도 언어를 모르니 그저 내 표정 가득 미안함을 담아 전하는 수밖에.








오후 3시 20분. 기차는 종점인 오타루 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내려서니 일 년 전 오타루 여행에 대한 기억이 슬그머니 되살아난다.

그때는 오랜 시간 길을 잃고 헤맸으나 이젠 그럴 위험도 없다. 








숙소까지 눈길 위로 캐리어를 끌면서 이동하면 도보로 20분이 걸린다. 눈길이라 캐리어가 북해도 겨울여행의 짐가방으로 적절치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고생을 각오했다.

태양은 벌써 하향곡선을 그릴 조짐을 보인다. 마음도 걸음도 조급해진다.

오타루 시민들의 일상이 담담히 이어지고 있는 거리 위를 서둘러 걷는 우리 둘은 영락없이 이방인처럼 보였다. 








난생처음 어마어마하게 쌓인 눈을 목도하게 된 동생이 날아갈 듯 신이 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길 옆으로 가슴 높이까지 쌓인 눈. 지붕 위에 서로 다른 날 겹겹 쌓인 눈들이 지층처럼 서로의 층위를 드러낸 모습이 우리 눈에는 한없이 대단해 보였다.







눈의 힘.

인류가 만들고 닦아놓은 문명의 풍경을 짧은 시간 안에 최소한의 흔적만 남기고 지워버리는 겨울의 힘이다. 


왜 우리는 이 두텁게 쌓인 눈을 보며 평온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떼어내고 싶어도 떼어낼 수 없던 치졸한 일상을 새하얀 망각 속에 가두는 힘 때문일 것이다.

어디로도 떠나지 않았으나, 새로운 세상으로 발 딛게 만드는 놀라운 나날.

홋카이도의 긴 겨울은 언제나 설일이다.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숙소는 여전했다.  

오래된 난로의 기름 냄새, 삐걱대는 나무 복도, 카페처럼 예쁘면서도 소박한 분위기. 어딘지 모르게 일 년 전보다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숙소 밖 계단 위로 소복한 눈도 새롭게 쌓인 것이겠지만, 작년과 똑같아  변함없이 일 년을 기다려 준 것만 같았다.


얼른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만 챙겨 서둘러 숙소를 나선다. 벌써 석양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지도를 펼치지 않고도 충만한 자신감으로 처음 보는 골목을  걸어내려간다.

다시 걷는 오타루의 길은 서로를 더욱 살갑게 알아가기 위한 설레는 만남이었다. 편안하게 흐르는 두근거림. 아아, 다시 만나 반가워!







한겨울 오타루의 눈길은 검은 때가 타지 않는다. 먼저 쌓인 눈이 녹기도 전에 또다시 내리는 눈, 잦은 폭설이 원인이다. 바깥세상에서 덕지덕지 붙이고 온 검은 때는 이곳의 압도적인 하얀색에 묻히고 만다. 

겨울의 오타루는 하얀 성지다.







일본 북부는 겨울이 길고 적설량도 많아 여러 지역에 걸쳐 축제(마쯔리)가 이어진다. 

매년 2월에 열리는 오타루의 <눈빛 거리축제>도  그중 하나이다.  

이 축제의 매력은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함과 아날로그적인 소박함에 있다. 마쯔리를 위해  만들어놓은 크고 작은 눈사람들은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매끈함과 세련됨보다는 사람의 손맛이 느껴진다. 

기계의 힘을 빌어 깎아낸 결점 없는 눈조각이 아닌 들쑥날쑥 못난이 눈사람들.



축제기간이 아닌 때의 오타루는 조용하고 한적하다. 조금만 걸으면 바다가 펼쳐지는 항구도시다. 

오타루 항구는 오고 떠나는 마음이 적요히 걸려 나부끼는 쇠잔한 항구처럼 보인다. 

추운 겨울 바다로 나가야 했던  오래전 뱃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뭍의 온기에 좀 더 몸을 비비고 싶지 않았을까, 괜한 감상에 빠져들기 딱 좋다. 하지만 이런 류의 애상(哀想)은 축제기간의 오타루에서라면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 축제가 열린 사카이마치혼도리로 들어서니 신이 난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 눈사람 좀 봐! 엄청 크다! 이 작은 것들 좀 봐! 정말 귀엽다!!"

사카이마치혼도리 입구부터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 눈사람들은 이런 호들갑이 유난스럽지 않을 만큼 귀여우면서도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여태껏 살면서 봐온 눈사람 숫자를 다 합해도 이날 오타루에서 만난 눈사람의 수보다 적을 것 같다.   

사카이마치혼도리를 따라 늘어선 눈사람들은 오타루의 상인들과 지역주민들의 작품이다. 축제기간 내내  거리를 지키고 있을 존재들이니 온갖 정성과 애교를 더해 만든 눈사람들에겐 이름을 붙여주기도 한다. 

모두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 해도 눈사람은 겨울 동안만 사랑받다 사라질 존재들이다.

아무리 사라지지 말라고 애원해도 따뜻한 봄이 오면 눈사람의 증발을 누구도 막을 수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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