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부터 남편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펜과 종이까지 들고 골똘한 모습이 낯설었다.
"뭐 해?"
다가갔더니 천안지도를 띄워놓고 그곳에 위치한 세 개 대학의 학생수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 내가 진작부터 수상했다. 퇴근하기가 무섭게 유튜브에서 '셰어하우스' '셰어하우스 운영' 같은 검색어를 써넣고 영상을 볼 때부터,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목록이 죄다 셰어하우스로 시작할 때부터 알만했다.
밥을 먹고 나자, 남편은 드라이브를 가자더니 천안으로 차를 몰아 '두정역'까지 달렸다.
"천안이 진짜 괜찮아! 여기에 대학교가 세 개나 있거든.
학생수도 많고. 역 쪽 아파트는 직장인들도 들어올 수 있어서 셰어하우스 하기 딱이야"
안 그래도 투자를 하거나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했다. 이사를 하며 남은 보증금 차액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남편의 말처럼 100세 시대에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르는 우리에게 준비가 필요한 건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또 우리에겐 경제적 자유란 목표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셰어하우스를 한다는 전제를 두고도 뭐 하나 깔끔하게 합의되는 게 없었다.
"자기는 두정역이 좋다는 거지? 근데 여기는 학교랑 거리가 너무 멀어.
매일 가는 학교를 15분 이상 걷거나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고 싶겠어?
나라면 학교 앞에 셰어하우스를 얻을 거야"
평소에 만보는 일도 아니고 이만보쯤 걷는 날도 더러 있는 남편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막걸리 좀 마셨던 대학시절을 회상하며 먹자골목이 근처에 있어서 편의도 좋은 데다 새 아파트라서 학생들이 선호할 거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게다가 천안 아파트 가격이 많이 하락한 상태이니 사두면 시세차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셰어하우스를 할 아파트를 살 거야? 매매를 한다고?"
당연히 월세로 집을 얻어서 셰어하우스를 운영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대출의 규모를 늘리고 시세차익을 노리며 새 아파트를 구매한다는 남편의 의견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게 어느 하나 합의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주말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천안으로 달려갔고, 호두과자를 사서 돌아오며 이제는 나이가 너무 들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MZ세대의 니즈를 파악해 보려고 애썼다.
남편은 매달 한 번씩 치킨데이를 만들어서 피자도 시켜주고 치킨도 시켜서 파티를 하는 건 어떠냐고 신난 얼굴로 눈을 빛내며 말했고, 나는 거기에 찬물을 끼얹으며 혼밥과 혼술이 일상인 MZ에게 모여서 치킨파티가 웬 말이냐고 일갈을 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무언가를 함께하고 있다는 즐거움, 생각을 실행하는 설렘만큼은 공유하며 우리는 엑셀시트를 채우고, 세부계획을 점검해 나갔다.
깔끔하고 실용적인 집 꾸미기와 블로그를 통한 마케팅은 내가 맡았고, 아파트 거래 및 그 외 모든 일은 셰어하우스를 너무나 하고 싶어 하는 남편이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특정 단지를 마음에 두고 몇몇 매물을 찍어놓으며 순항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계획은 곧 거대한 벽을 만났다.
"시몬스나 에이스 매트리스를 넣는다고?"
"어, 잘 자는 게 중요하잖아 방도 좁은데"
남편은 이 셰어하우스에 너무나 진심이었다. 계산과 순익에 누구보다 두뇌회전이 빨랐던 이과남자는 자신의 과거가 겹쳐서인지 거의 프리미엄최고급럭셔리 셰어하우스를 제공할 기세로 몰두했다.
우리는 대학교 때 미팅으로 처음 만나 서로의 대학생활과 직장생활을 지켜보며 가치관을 함께 세웠고, 결혼까지 이르며 함께 나이 들고 있었다. 경남 소도시에 살았던 그가 진주유학길에 오르며 열일곱부터 하숙을 시작해서 누구보다 내 집 마련에 열망이 강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이해했고, 스무 살부터 학교 기숙사를 비롯해 친구들과 원룸에 살며 월세를 나눠내고 살았다는 것도 내가 잘 알았다.
남편이 대학졸업 후 직장 근처로 집을 옮길 때, 당시 여자친구였던 내가 데이트 겸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 그때 테헤란로에 있던 남편의 회사를 중심으로 집값이 싸다는 건대입구, 면목동, 신림동까지 안 돌아본 곳이 없었다. 태어나서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내가 몰랐던 세상이 거기 있었다. 그때 봤던 고시원의 충격적인 환경도 잊을 수 없었지만 창문이 없던 집이나 신림동 달동네의 옥탑방도 잊을 수 없다. 본가가 멀리 떨어져 있어 어쩔 수 없이 독립해야 하는 어린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크지 않았다.
상황이 여의지 않자 사회초년생이었던 남편은 결국 집에 전화를 걸어 전세금을 받았다. 대학생 때 점심값을 절약해 나를 만나러 왔던 남편을 가난한 집 아들이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그가 건물주님의 아들이자, 의외로 철이 빨리 들어 부모님께 돈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정신이 올바른 남자였다는 걸 알고 새삼 다시 보였다.
남편의 부모님이 사시는 지역에서는 방세칸짜리 빌라 전세를 얻을 수 있는 돈을 받았지만 신림동에선 현관문을 열면 싱크대와 마주하는, 이불을 깔면 바닥이 별로 남지 않는 원룸만이 가능했다. 그래도 창문이 컸고, 역이랑 가까웠으며 따뜻한 집이었다. 그전까지 남편이 거쳤던 집들은 대부분 추웠고 곰팡이가 피었고, 높거나 너무 낮았고, 좁거나 불편했다.
남편이 지나온 시간들이 그를 초특급럭셔리프리미엄스페셜 셰어하우스의 주인을 꿈꾸게 만든 게 분명했다. 남편은 시몬스침대도 모자라서 쌀과 김치, 참치와 햄 같은 것들도 무제한으로 제공하자고 했다. 컴퓨터는 필요 없나? 티브이를 큰 걸로 놓을까? 더 주지 못해서 안달인 그는 진정한 기버였다.
현실감각 없고 돈 개념 없는 나였지만 누구 하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남편이 갖추고 싶어 하는 가전과 가구, 기타 품목을 생각하면 아무리 타이트하게 잡아도 천오백이 들었다. 혼수준비가 따로 없었다. 우리가 네 명의 학생이나 직장인을 받아서 일 년에 벌 수 있는 돈이 과연 천오백을 넘을 수 있을까?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이 초특급럭셔리프리미엄스페셜 셰어하우스를 포기하든지, 내가 수익을 포기하고 이자만 내면서 언젠가 그 아파트가 오를 때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타협하자면 할 수도 있었고, 가격을 더 올리거나 다른 셰어하우스들처럼 작은방에도 이층침대를 넣어가며 인원을 늘렸다면 수익은 보장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든든한 파이프라인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 역시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남편이 그랬듯 어린 학생들 대부분은 본가에 돌아가면 훨씬 더 넓은 자신만의 공간을 갖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학자금대출을 갚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나 역시 푹 커진 소파와 삐걱거리는 매트리스를 제공하면서 매달 40만 원, 50만 원씩 받으면 마음이 불편할 거 같았다. 그러나 80수 이상의 침구, 좋은 향기가 나는 따뜻한 집을 제공하는 기버가 되기엔 우리가 너무 가진 게 없었다.
우리 역시 대학시절 원룸에서 시작해 15년을 달려오기만 했으므로, 그렇게 달려서 잘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아직 다주택자는커녕 이자내기 숨 가쁜 현실을 살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했다. 언젠가는, 너무 멀지 않은 시기에 정말로 누구나 오고 싶어 하는 초특급럭셔리프리미엄스페셜 셰어하우스의 주인을 꿈꾸며 냉장고에 있던 호두과자를 모두 먹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