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뻔뻔함으로 글을 씁니다.
동생이 해외이사를 앞두고 우리 집에 며칠 머물 때였다. 마침 하교한 딸이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쯤 있었던 회장선거로 흘렀다.
"요즘은 애들이 다 적극적이어서 회장선거에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나온대. 그러다 보니 작년엔 표를 하나도 못 받은 아이가 있어서 선생님이 출마한 애들은 자기 이름 쓰라는 말을 꼭 해주더라고”
0표를 막기 위한 선생님의 배려가 인상적이어서 건넸던 말에 동생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히 자기 이름을 써야지!”
옆에 있던 딸도 질세라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너희는 그럼 회장선거 할 때마다 너희 이름을 써냈단 말이야?”
초등학교 때 반장은 물론이며 중고등학교 때까지 전교부회장 자리를 놓지 않았던 여동생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응! 내가 나를 믿어줘야지, 내가 나를 지지하는 게 당연하잖아?
스스로를 못 믿으면서 다른 애들한테 뽑아달라고 할 수는 없지.”
내 배에서 어떻게 네가 나왔지 싶을 정도로 외향적인 딸도 여동생과 같은 말을 했다.
뭐지 저 뻔뻔함은? 선생님이 시켜서 자신의 이름을 썼을 거라고 생각했던 딸,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동생의 선택은 조금 충격이었다. 쟤네는 어떻게 고작 열 살, 열한 살의 나이에도 자신을 믿고 지지할 수 있었을까? 네모반듯한 종이를 받아 들고 누가 볼까 싶어 손으로 쪽지를 가리며 마음을 졸이는 아이였던 나는 동생과 딸이 오히려 의아했다.
그때의 나는 잠깐 내 이름을 쓰고 싶은 충동조차 이기적인 마음으로 여겼다. 결국 칠판에 적힌 이름들 중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을 매해 썼다. 스스로 뭘 좋아하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조차 아주 아주 늦게 깨닫는, 나보다 남을 위해 많이 웃던, 그때의 나는 그런 어린이였다.
‘내가 나를 믿어줘야지’, 같은 말도 당시 초등학생이던 내겐 너무 멀었다. 나는 내 마음이 보내오는 신호는 무시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데 더 마음을 쏟는 어린이였으니까. 친구가 나를 반장 후보에 추천해 주었기 때문에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고, 동시에 부모님이 기뻐할 얼굴을 떠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후보 공약을 발표했다.
실제로는 부끄러움이 많아 일어서서 인사하는 일도 편하지 않았고 앞에 나가서 떠든 친구의 이름을 쓰는 일도 곤욕스러웠지만, 어떤 해에는 반장이 그다음 해에는 부반장이 되어 버거운 한 해를 보내곤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 몰랐던 아이였다. 능동적인 선택보다 수동적인 상황에 놓여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으로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조용히 앉아 글을 쓰던 순간, 그때가 나를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인지 글을 쓰면서야 깨닫게 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글쓰기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나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남았다. 김신지 작가는 책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누구한테도 보이면 안 되는 마음처럼, 하지만 늘 누구에게든 들키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어’라고 고백한다.
나 역시 혼자 오래 마음속으로 써왔던 글을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내보내며 비슷한 마음이 된다. 반장선거 투표종이를 받아 들고 이제야 내 이름을 써넣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나는 사실 글쓰기를 좋아해. 나는 그런 아이야. 당신이 나를 찍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내가 쓴 글을 나는 좋아하니까 너도 한 번 읽어보지 않겠냐는 마음이 되어 당신에게 글을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