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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Dec 26. 2023

글쓰기로 눈물을 닦아 본 적 있나요?

슬픔을 극복하는 나만의 방법



서른다섯이 되어 임신을 하면 '노산'이라는 말이 붙는다. 서른다섯, 그때의 내가 창창하고 싱그러웠던 걸 생각한다면 '노산'같은 단어를 갖다 붙이는 일이 부당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지만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급격히 상승하는 시기가 딱 그때부터라니 달리 할 말이 없다. 나는 나쁜 확률을 피해 볼 심산으로 서른넷에 둘째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인생의 효도를 다하고 있는 다섯 살짜리 귀여운 첫째가 자꾸만 자라는 게 너무 아쉬워서, 인생의 행복을 유예하고 싶은 마음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서른넷에 품었던 그 생명은 낳기도 전에 심장이 멈췄다. 유산을 하고 나서야 세 명중 한 명이 겪을 수 있는 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막상 내 일이 되자 무릎이 꺾일 만큼 힘들었다. 일상을 유지하던 힘이 사라졌고, 인생을 살아갈 의욕도 잃었다. 3개월 간 휴직을 하고 집에서 많은 시간을 울면서 보냈다.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것은 죄책감이었다.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는 아침시간이 버거웠던 걸까? 첫째 아이가 다쳐 안고 뛰었던 날 때문이었을까? 찾으려고 들면 유산의 원인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병은 아니지만 증상이 나타나면 삶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매일 약을 복용했다. 병원에서는 임신기간에도 변함없이 약을 먹어야 무사히 출산까지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약봉투 겉면에 쓰여 있는 기형 출산에 대한 경고를 읽으면서 그 약을 삼킬 수는 없었다.


의사를 신뢰할 수 있을까? 건강하지 못한 아이를 키우는 삶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임신한 이후로 약을 한 번도 먹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유산의 원인이 자가면역질환 때문은 아니라고 했지만 유산수술 후 나는 꽤 오래 괴로웠다. 아픈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아 하는, 겨우 그 정도의 얄팍한 사랑을 가지고 엄마가 되려고 했던 나를 오래 미워했다.  


        

유산의 슬픔은 가족 모두의 것이었지만 남편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자신의 생활로 돌아가 있었다. 그의 변하지 않는 성실함과 부지런한 행동이 ‘언제까지 슬퍼만 하고 있을 거냐고’ 내게 물어오는 것 같았다. 남편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점심시간에 전화를 걸어 죄책감에 갇혀있던 나에게 하루의 계획을 물었다. 사람에 치였을 출근길을 거쳐 빡빡한 오전 업무를 마친 그가 던져오는 질문에 나는 차마 누워 있을 거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충 글을 쓸 거라고 둘러댔다.      



어떤 말은 곧 다짐이 되고, 어떤 말은 선언이 되어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날부터 나는 소설을 써 내려갔다. 내가 만든 인물을 세우고 인물에게 서사를 부여하며 마음에 짐을 서서히 내려놓게 되었다. 시에서 하는 공모전에 그 소설을 냈던 건 남편이 소설을 다 쓰면 어떻게 할 거냐고 지치지도 않고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완성하고 일주일 후에 복직했고 동시에 유산의 기억도 내 인생에서 사라져 갔다. 한때는 가슴이 저릴 만큼 아픈 일이 아무렇지 않게 된다는 게 스스로 의아할 정도였다. 그쯤 시 홈페이지에서 당선자 명단이 공개됐다. 당선작은 허리가 굽어 한평생 땅만 보고 걸었던 사람이 죽고 나서야 파란 하늘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내용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읽지 않아도 대상을 받은 작품의 가치가 전해져 왔다. 심사평을 쭉 읽어 내려가던 나는 글의 말미에서 내 이름을 보았다. 세 작품 중 어느 작품을 뽑아도 손색이 없었지만 문학적 울림이 컸던 작품에게 상을 주게 되었다면서 선정되지 않 작가들의 이름을 다른 지면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에 내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다른 지면에 이름을 올리는 작가가 되는 대신 나는 임신을 했다. 자가면역질환 약은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여전히 첫아이를 안고 뛰었고, 출퇴근을 이어갔지만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끝까지 지킨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품었다. 그렇기에 조산으로 입원했을 때에도 500g이 채 되지 않는 아이를 낳아야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담담했다. 태몽이 없는 둘째를 두고 출산 전 날까지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무색하게 둘째는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안녕, 이따 봐’ 인사를 할 때면 아이는 짧은 팔을 머리 위까지 힘껏 끌어올려 하트를 만들어준다. 매일 차오르는 사랑으로 나를 향해 웃어준다.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되나 싶을 만큼 황송한 날들이다. 저 아이의 매일을 촘촘하게 채워주느라 소설 쓰는 일은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버렸다. 이렇게 살다 간 앞으로 어떤 지면에서도 내 이름을 찾아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아이가 만들어준 하트 안에 전부 다 들어있다.


그러나 글쓰기로 눈물을 닦았던 기억 또한 잊지 않는다. 내가 썼던 유일한 소설은 삶의 의미를 잃었던 나를 다시 삶 속으로 끌어올려줬고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아픈 순간에도 쓴다는 행위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경험을 남겼다. 그 이후로 나는 삶을 조금 더 담담하게 대하게 됐다. 내가 꿈꾸는 작가의 삶과 멀어졌을지라도 한 글자 한 글자에 죄책감과 후회, 아픔과 고통을 실려 보내면서 나는 글쓰기라는 무기를 가진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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