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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Feb 28. 2024

하산하는 마음

심리 상담을 종료하며

2023년 4월에 쓰고 badacmoves로 보낸 글.


심리상담을 종료했다. 몇 회기나 했을까 궁금한데 이럴 때면 엑셀시트로 정리해놓지 않은 게 살짝 아쉽다. 일기장을 뒤져보면 찾을 수 있을 텐데 생각하다가 혹시 구글캘린더에 있지 않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있다! 대충 눈으로 세어봤는데 80여회다. (시간이 있을 때 정리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신난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지원을 세 번 받아 비용를 지원받았으니 나머지 회차의 상담비, 교통비도 계산해보고 싶다.)


2019년 5월부터 매주 토요일에 전북 완주에서 경기 안양으로 상담을 다녔다. 집에서 삼례역까지 20분 동안 운전해서 간 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수원역으로 2시간 반, 수원역에서 1호선을 타고 안양 범계역으로 1시간, 역에서 상담소까지 걸어가는 시간까지 편도 이동시간만 총 4시간이 걸렸다. 회사에 다니면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을 때라 한 시간 상담을 위해 그렇게 긴 시간을 이동하는 데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매주 기차 여행을 해서 설렜고, 나를 위해 공들여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에 뿌듯했다. 회사를 다녀볼까 다시 마음 먹은 까닭도 백수에게 시간당 1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부담스러워서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여행도 다니고 일기도 쓰고 심지어 귀촌도 하고 회사도 그만뒀다 다시 다니는 등 각종 민간 요법을 이용해서 마음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담을 받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할 때마다 돈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그래서 벌어야만 했다. 역시 회사는 다닐 게 못된다는 사실을 몇 개월만에 깨닫게 되었지만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상담비 벌어야하니까, 나는 굶어도(거짓말!) 고양이는 먹여 살려야 하니까 좀만 더 참자며 2년 넘게 다녀 계약종료일까지 버틸 수 있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데도 싸우려다가 결국 상처를 잔뜩 받고 나왔다.)



1년 쯤 지나서는 격주로 기간을 늘렸고 두 번째 지원이 끝나던 2021년에는 무직 상태라 상담을 계속 받기에 비용이 부담되었다. 언제쯤 이 상담을 끝낼 수 있을까. “언제까지 상담을 받아야하죠? 이제 그만 하산하거라 도사님이 말해주듯 선생님이 말해주나요?” 선생님은 지금 당장 그만 해도 된다고 했다. (미리 말 좀 해주시지.) 그래서 종료했다. 3년이나 다녔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약물치료나 폐쇄병동에 당장 입원해야 하는 중증 환자가 아니고 시기나 상황에 따라 약간의 우울감을 느끼는 정도니까 선생님과 그동안 연습한 것처럼 감정을 다루면 되겠지 생각했다. 선생님이 그만 해도 된다잖아. 그런데 아니었다. 석 달 후 나는 울면서 선생님께 상담을 다시 시작해야할 것 같다고 연락했다. 다시 매주 상담을 받기 시작했고 1년이 또 흘렀다. 그래도 이번엔 두 달쯤 지나니 2주에 한 번만 만나도 될 것 같았고, 차차 기간을 더 늘려 최근에 한 달에 한번씩 만났다.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면 약속한 날이 되기 전에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주 세 번째 지원이 막 끝나 개인 비용을 들여 상담을 지속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번엔 선생님께 묻지 않고 상담을 종료하기로 했다. 누가 정해주지 않아도 내가 알 수 있었다. 그만해도 되겠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감정 기복이 심한,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살 테고, 쉽게 우울해지겠지만 이제 불안한 시간을 어떻게 지나가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외로움과 괴로움, 슬픔과 서운함, 분노와 짜증, 어찌할 바 모르겠는 헛헛함이 찾아오면 나는 갖가지 방법으로 그 감정을 감당할 것이다. 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지금까지는 선생님이 나에게 많은 방법을 알려주고 조언을 했지만 이제는 선생님을 떠날 때다. 상담 시간 전에 하고 싶은 말을 일기장에 적으면서 정리하다보면 벌써 상담을 마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정말 하산할 때구나. 여전히 내게 전문가가 필요하다면 다른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 다시 선생님을 만나더라도 다른 산에서 만나고 싶다. 선생님을 여전히 좋아하고 그간의 도움에 감사하지만 헤어질 때가 된 듯하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조금 힘들었는데 계절이 바뀌듯 다시 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진다. 나의 마음은 날씨와 같다. 따지고 보면 원인이 있기야하겠지만 찾아내서 제거할 순 없다. 추우면 따뜻하게 입고 햇살을 찾아가야지 한기가 어디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고 한 가지 이유도 아닐 것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이 든다. 마음에 그늘이 드리우는 순간을 알아채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안다고 벌떡 일어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할 테지만 제자리서 뒤척이는 나를 대견해하고, 춥다고 이불 속으로 더 들어가서 눈을 꼭 감아버리는 나를 좀 봐주고, 빌어먹을 날씨를 욕할 것이다. 그러다 정 안되면 또 울면서 상담 선생님한테 전화하지 뭐, 별 일 아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만나는 동료 상담 그룹이 있고, 언제든 다시 찾아갈 선생님이 있고, 아직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정기적인 상담 없이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했다. 그거면 됐다.



*상담일지는 바로 정리했다. 총 84회 상담을 받았다. 36회 지원금을 제외한 48회의 상담비는 3,840,000원, 교통비는 1,485,000원이었다. 상담비는 8만원이었고 5년간 같았다. 지원받는 기간에도 교통비는 부담해야했으니 코로나이후 비대면으로 진행하기 전과 이후 3회 대면 상담까지 총45회의 왕복 교통비는 대략 33,000원으로 계산했다. (무궁화호 기차요금은 28,800원이고 수원역에서 범계역 지하철 요금과 집에서 삼례역까지 10킬로미터 주유비는 적당히 갈음한다.)


**엑셀에 정리한 상담일지는 OS 업그레이드를 했다가 한글프로그램이 실행안되는 바람에 다시 다운그레이드를 하고 그 과정에서 맥북을 포맷하고 그러면서 파일이 사라져버렸다. 아쉽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캘린더를 보고 추적해서 다시 정리할 수 있지!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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