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정한 손길들

by badac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어제 한밭도서관에서 빌려온 마스다 미리의 만화책을 보았다. 조금 지루해서 졸았다.


점심을 먹으려고 오랜만에 흰 쌀밥을 지었다. 밥을 지은 것도 오랜만이고, 잡곡을 섞지 않은 백미로 밥을 지은 지도 한참 되었다. 엄마가 김장 김치를 보내면서 쌀도 조금 보내주셨다. 참고로 엄마는 쌀농사를 짓지는 않으신다. 원래 식사계획은 2인분의 쌀밥을 지은 뒤 한 공기 정도의 쌀밥을 어제 끓여먹고 남겨둔 삼계탕 국물에 넣어서 폭폭 끓여서 닭죽을 만드는 것이었다. 삼계탕은 믿고 먹는 청미래농장에서 온 은퇴한 닭으로 만들었다. 신나게 뛰어놀면서 유정란을 낳아 인간들에게 맛있는 1번 달걀을 내어주신 소임을 다하고 사후에 살코기마저 내어주셨다.


압력솥을 열고 갓 지은 밥을 한 숟갈 떠서 씹었다. 달았다. 닭죽으로 만들기 아쉬워서 그냥 맨밥을 몇 숟갈 떠 먹었더니 한 공기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김을 한 통 꺼내서 가스레인지 앞에 선 채로 마저 먹었다. 중간 중간 삼계탕 국물을 마셨다. 배가 불렀다.


만화책과 그림 에세이 몇 권을 들춰봤다. 몇 해 전부터 말로만 꿈인 ‘만화 그리기’ 연습을 위해서였다. 춥고 우울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오랜 친구 오리가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해주었다. 2019년에 옥수수만화 모임을 만들어서 수요일마다 만화를 그리려고 했었는데 잘 안됐다. 연초에 만화책을 낸 친구 미래를 부러워하면서 나도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다시금 소복이의 ‘만화그리는 법’을 읽었지만 그림은 안 그렸다. 더이상 만화 그리고 싶다는 말도 안 했다.


친절한 그림 선생님 오리 덕분에 미가옥 그림도 신나게, 맛있는 식탁 그림 일기도 그리고, 3주에 한번씩 돌아오는 스프 삽화도 그렸는데 언제부턴가 그림 그릴 생각은 전혀 안하고 살았다. 오리는 작년 겨울에 그랬듯 이번에도 먼저 그림을 그려보자고 제안해주었다. 어제는 매해 만드는 일러스트 달력과 다이어리를 보내주었다. 다정한 편지와 함께. 고맙고 또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냉장고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다. 앞면의 눈밭 여우도 예쁘고 편지 내용도 감동적이어서 어느 면으로 붙여야 할지 고민했지만 바로 뒤집어 볼 수 있으니까 우선 여우 그림으로 붙여 뒀다.


배가 불러서인지, 만화책이 재미가 덜해서인지, 둘 다인지, 생리통이 심해 배 위에 올려놓은 유단보(보온 물주머니) 때문인지 나른했다. 1시가 조금 넘으면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얌타이가 전화를 한다. 어제부터 배가 아프다고 했으니 통증은 어떤지,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뭐했는지 묻고 대답하며 재잘재잘 대화한다. 아침 출근길에도 거의 매일 통화를 한다. 자꾸 늦잠을 자서 우울해지는데 그나마 좋은 기운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퇴근길에도, 잠들기 전에도 여전히 몇 시간씩 이야기를 한다. 계속 계속 말하고 듣고 꺄르르 웃고 그게 또 좋아서 눈물이 난다. 이것은 사랑. 전에 썼던 일기장의 한 대목을 읽어주거나 그림 일기를 보여주면서 오랜만에 옛날에 그린 그림들을 봤다. 얌타이는 이렇게 좋은데 왜 이제 그림을 안 그리냐고 했다. 당시엔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어떻게 해야 잘 쓰고, 잘 그릴까 싶어서 아쉽기만 했는데 역시 시간이 지난 뒤에 보니 나름 귀여웠다. 더 많이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면서는 또 왜 이렇게 별로일까 마음이 안 좋을 테지만… 못하는 줄 알면서도 계속하는 게 재능이라 했으니 다시 뭐라도 해봐야지. 꾸준히 하거나 이것저것 시작하는 성실한 재능은 있는 편이니까.


호르몬 때문인가 달디단 과자가 먹고 싶다. 집앞 가게로 뛰쳐나가 초코크림 오레오와 블루베리쨈 쿠키를 샀다. 단숨에 절반 이상을 먹다가 입이 달아서 보이차를 우렸다.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커피를 줄여보겠다고 원두를 사두지 않았다. 집 앞에 마음에 드는 카페가 있어서 커피를 사올까 하다가 말았다. 귀찮기도 하고 돈도 없는데 카페에서 커피를 사 먹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보이차를 마시는데 예술로 사업을 같이 했던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어디시냐 묻길래 집이라고 했다. 집에서 뭐하시냐 하길래 만화책 본다고 했다. 근처인데 차나 한 잔 해도 되겠냐 해서 오시라고 했다. 반가웠다. 정기적인 모임도 없고, 할 일도 많지 않아서 심심하고 쓸쓸하고 뭔가 적적한 날들이었으니까. 선생님도 며칠전에 내가 올려놓은 ‘겨울 우울’에 관한 일기를 보고 걱정되어 겸사겸사 들른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며칠전엔 인스타 친구에게 디엠으로 다정한 안부 인사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사이도 아니지만 마음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낯 가린다고, 귀찮다고, 사람들에게 마음도 잘 안 여는데 참 복도 많구나. 아, 완주 친구에게도 오랜만에 연락이 왔었구나.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안부를 물었다. 혹시 연애가 잘못됐나 무슨 큰 일이 있나 평범하지만 다정한 말투. 우울한 시기를 오래 지켜본 친구들이어서 나를 믿으면서도 조심스럽게 응시한다. 연말이라고 전화해준 친구, 재미있는 거리가 있을 때 떠올려주는 동네 친구, 쓸쓸하다고 연락하면 놀러오라고 해주는 친구. 역시 운이 좋고 복이 많다.


예술로 동료 선생님에게는 중국 홍차 금준미를 대접했다. 이 겨울에 뭘 먹고 살까, 내년엔 뭘할까, 이런 저런 작업 아이디어를 나누다가 대흥동 사쿠사쿠에 텐동을 먹으러 갔다. 맛있었다.


외향형 아니고 내향형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역시 내향형 인간은 아니었다. 친구도 많고, 사랑 받는 것도 좋아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난다. 다정한 손길을 떠올리면서 긴 일기를 쓰고 싶었다. 내일도 힘을 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조금 우울한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