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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Feb 29. 2024

앉아서 걱정하기

상담을 다시 시작하면서


다음주에 상담을 다시 시작한다. 2023년은 잘 지낸 편이었다. 일기와 마음날씨표를 살펴보니 2월에는 좀 힘들었던 것도 같지만 3월부터 슬슬 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책을 준비하고, 예술인파견지원사업에 지원하고 선정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일하는 데 재미를 느꼈다. 책이 나온 뒤로 정신없이 바빴고 연애를 시작했고 전에 느껴보지 못한 충만한 행복과 육체 피로를 동시에 느끼며 몇 달을 보냈다.


무기력과 우울감은 파견지원사업이 끝나가며 약속과 일정, 할 일이 줄어든 10월부터 슬금슬금 조짐을 보였다. 이제 앞으로 몇 달은 수입이 없다는 불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조급증이 일었으나 방학같은 휴식을 보내면 되겠거니 싶었다. 약간 심심한 듯하지만 여름에 바빴으니 한가할 땐 여유를 즐기자고 마음 먹었다. 사랑에 미쳐서 정신을 못 차리는 듯 싶지만 언제 또 이런 시간이 오겠나, 고마운 일이라고 여겼다.


당장 생활비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앞으로 어떡하지 막막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프리랜서나 각종 지원사업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경우, 연초에 일이 없어서 봄이 오기 전까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2020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2021년에는 안정적으로 실업급여를 받았고, 2022년과 2023년 1~2월에는 운 좋게 일을 하고 있었다. 수입이 없는 2024년 연초가 다가온다는 사실이 불안했을까. 지금 지난 가계부를 들춰보니 10월의 활동비가 입금되는 11월,  외주 작업비가 입금되는 12월까지는 그렇게까지 불안할 이유가 없었는데 11월부터 계속 불안했다. 1월에는 만기된 적금 이자와 얼마 안 되는 원고료, 인세, 가끔 하는 한국어 과외 아르바이트 수입까지 다 그러모으니 어찌저찌 백 만 원은 되었다. 2월 이후에는 어떡하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할 텐데… 그렇게 지금까지 전전긍긍하며 보냈다. 그리고 오늘 확인한 2024년 2월의 수입 355,050원. 할 수 있을 법한(뽑힐 가능성이 그나마 있어 보이는) 아르바이트와 재택근무, 계약직 일자리에 지원했다. 모두 탈락.


꾸준히 쓰는 사람임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12월 12일부터 메일링 뉴스레터를 재개했다. 듣는 사람은 없지만 하는 데 의의를 두는 팟캐스트도 다시 녹음해서 올린다. 계속 가라앉기만 하는 나를 보다못한 친구가 온라인으로 그림 수업을 해준다. 친구와의 약속,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감을 지킨다. 좋은 글을 쓰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뉴스레터 발행이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민망함에,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다는 미안함에, 할 일을 끝내고 마음이 좋지 않다. 가끔씩 구독료를 보내주는 독자, 언제나 멋지다고 말해주고 맛있는 것을 사주는 애인, 내 넋두리를 들어주는 절친, 지금 내 상황을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기운이 올라오지 않는다.


갑갑하다. 과거에 여러번 느꼈던 익숙한 이 기분, 그렇지만 전처럼 두렵거나 세상이 무너질 듯한 절망감은 들지 않는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는 걸 알고 진짜로 내가 무너지지 않을 거란 건 안다. 그래서 담담하다. 그런데 그래서 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느낌이 든다. 괴롭고 괴로워서 미칠 것 같은 건 아닌데,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 애인과 함께 있는 주말이 되면 비현실적으로 즐거워서 모든 걸 잊고 그 순간을 산다. 그게 힘이 되어 이만큼 버틴걸까, 그 간극이 너무 커서 더 불안정해진걸까. 어쨌든 나는 몇달째 가슴이 답답하다. 그래서 결국 예술인복지재단의 개인심리상담 지원사업을 이용해서 다시 예전의 상담선생님을 만나기로 했다.


설을 맞이해 잘 지내냐는 안부인사를 주고 받을 때만 해도, 저는 잘 지내요. 사랑을 믿지 않던 제가 지금은 이렇게 행복하네요. 겨울이라 조금 우울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파도를 타고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어요. 라고 말했는데. 도저히 도저히 안되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하고 다시 손을 내밀었다.


2022년 6월, 나는 귀촌해서 8년 간 살던 완주에서 대전으로 이주했다. 계속 완주에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한 건 몇년 전부터였지만 그해 4월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이사를 준비했다. 잔잔하게 내 속에 살던 바람은 태풍이 되었다. 어떤 불안이 나를 부추겼을 텐데 2022년 3월과 4월의 수입이 각각 6,346원과 91,058원인 것도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23년 3월의 수입은 449,410. 한국어과외도 글쓰기과외도 계획되어 있지 않은 2024년 3월과 4월이 걱정된다. 시간이 많으면 글도 많이 쓰고, 책도 읽고,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훈련과 연습에 매진하면 얼마나 좋아, 진짜. 누워서 걱정할 시간에. 근데 나란 사람은, 아마도 대다수의 많은 사람은, 연약하고 위태롭고 불안한 존재여서 혼자서는 잘 안된다. 누군가와 함께, 도움을 받아 엉금엉금 가야지. 다음주부터 최소한 앉아서라도 걱정하려고 한다. 상담선생님을 모니터 안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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