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나는 학생이라기보다 산업 역군에 가까웠다. 학기 중엔 평일 알바, 방학땐 건설현장, 명절 시즌엔 포장 알바 등 산업군 전반에 몸을 담았다. 그런 내 인생에 방학맞이 여행은 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우간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여행을 결심했다. 우간다 대학은 원체 여유롭기도 했지만 방학 중 나는 한가함의 인간화 그 자체였다. 친구들은 짐을 싸서 고향으로 떠났고, 기숙사엔 나만 덩그러니 남아 지글거리는 기숙사 양철 지붕 아래에 누워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풀 베는 일이라도 해볼까 했는데 그라운드 워커의 하루 일당이 1200원이라는 말을 듣고 포기했다. 시간당 1200원이어도 할까 말까인데 일당 1200원은 좀 심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친구들의 집 방문 여행이었다. 여행은 살아보는 것 아니겠는가. 그때 그 기세로 에어비앤비를 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나를 초대해 준 친구의 집은 꽤 깊은 숲을 뚫고 들어가야 했다. 아프리카의 숲을 지나고 흙집이 모여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친구의 집은 5평 남짓한 흙집 3동과 깔끔한 마당이 있는 나름 그 동네 중산층 집 같아 보였다. 집에 짐을 풀어놓고 길거리 퍼레이드를 했다. 몇 번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당황하진 않았지만 꽤나 황당한 일이긴 했다. 나를 데리고 마을 시내를 가족들과 함께 걷는 것이었다. 내가 행열 중앙으로 걸으면 친구와 그의 가족들이 학익진을 만들어 양 옆을 보좌하였다. 친구 어머니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시며 동네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알 수 없는 영향력을 과시했다. 친구의 말로는 이 마을에 온 백인은 처음 이라고 했다. 난 백인 아니지만 굳이 말을 바로 잡진 않았다. 어차피 처음이라는데 아주 하얗냐 조금 하얗냐가 대수일까 싶었기에. 그리고 이미 어머님는 손을 흔드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유색인 입장에서 인종를 백인, 황인, 흑인 등으로 분류하지 아프리카 사람들에겐 흑인과 백인만 존재한다고 했다.
퍼레이드를 마치고 흙집으로 돌아온 나는 친구네 가족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오랜만에 손님이 왔다며 닭수프에 쌀밥을 내어주었다. 학교에서는 옥수수떡도 감지덕지라며 콩수프에 콕 찍어 흡입을 하던 친구였는데 집에 돌아오니 형편이 좀 나아 보였다. 식사대접에 걸맞은 에피소드를 골라 온 가족에게 함박웃음을 전해주곤 작은 흙집으로 몸을 옮겼다. 겉에서 볼 때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 도자기의 내부에 들어온 듯 깨끗하고 아담했다. 친구의 말로 벽과 바닥을 소똥으로 마감 처리하여 깨끗(?)하고 특히 벌레가 없다며 우간다 가옥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호롱불 밑으로 개미들이 줄지어 무언가를 급히 훔쳐 달아나고 있는 모습을 친구가 보진 못했나 보다. 하긴 아프리카에서 개미는 벌레 축에도 못 끼지만.
평온하고 나른한 아프리카의 아침으로 기억한다. 하나님이 대지에 이슬로 축복을 내려 풀잎과 바나나 잎사귀들이 촉촉한 푸른빛을 내뿜었다. 그 풀들 사이로 어미 닭들이 병아리 무리를 이끌며 아침 식사하기에 바빴다. 날개 끝에 작은 깃털이 난 사춘기 병아리들은 웅덩이에나 어슬렁 거렸다. 단걸음에 달려와 식사를 보채는 어미닭을 소 닭 쳐다보듯 보곤 다시 웅덩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취했다. 그런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난 오전 낮잠, 오후 낮잠 스케줄을 마치고 가족식사에 초대되어 또 닭수프와 쌀밥을 먹었다.
이튿날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록 이곳은 늘 평화로움뿐이었다. 밤엔 태고의 암흑이 존재했고 아침과 낮은 지구 생명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같은 루틴으로 지구의 역사를 이어갔다. 어제 보았던 도마뱀은 오늘도 망고나무 가지에 붙어 연신 팔굽혀펴기를 했고, 닭들도 병아리들도 어제와 같은 식사행렬에 바쁘게 움직였다. 다만 사춘기 병아리의 꽁지를 쪼아 붙이던 어미닭이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 시절 엄마들은 다 지친다. 나도 중2병이 도졌을 때엔 새벽 라디오, 연애편지, 구레나룻, 날 비추는 거울이 전부였다. 이런 나를 인간 만들겠다고 훈육하던 엄마는 가끔 지쳐서 방안에 누워있었다. 아마 어미닭도 바나나잎 아래 지쳐 쓰러져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 역시 오전 낮잠, 오후 낮잠, 닭수프, 쌀밥 이렇게 지구 생명체로써 하루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았다.
나흘째 아침, 집 앞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대자연을 관람하던 중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어제까지 사춘기 병아리만 물웅덩이를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다른 병아리들까지 합세하여 방황을 하고 있었다. 저쪽 멀리에 한두 무리만 어미를 쫓아 아침밥을 챙겨 먹고 있었다. 이놈들은 뭘까. 파업한 건가? 아님 단체로 금식투쟁에 들어간 것인가? 그러기엔 너무 눈에 초점을 없는데. 저 눈빛은 뭐랄까 마치 마드리드 공항에서 눈앞으로 100만 원짜리 비행기를 날리고 홀로 남겨졌을 때 내 것과 비슷한데. 어딘가 찜찜했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첫 3개월은 모든 것이 신기했고, 6개월은 이제 뭔가 좀 알 것 같았다. 6개월이 지난 후론 '아~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똥멍청이구나' 하며 살았는데, 그날이 그 똥멍청이의 첫날이었 걸로 기억한다.
가로등이 없는 아프리카는 밤이 빨리 찾아왔다. 그날도 어김없이 친구의 가족들과 즐거운 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손님이 와야지만 닭고기 맛을 볼 수 있는 꼬맹이들은 밥 짓는 소리에 신이 나있었다. 코 흘리개 막내는 내 하얀 손을 신기하게 더듬으며 주변을 달처럼 맴돌았다. 이윽고 기다리던 닭수프가 나왔다. 멀리서 요리하는 걸 보니 토마토, 양파, 정체 모를 가루만 집어넣었는데 정말 환상의 맛이 났다. 나도 신이 나서 오른손으론 닭고기를 잡고 왼손으론 밥알들을 모아 입에 쏙 털어 넣었다. 병아리들 같이 오물오물 쌀밥을 먹는 꼬맹이들을 보며 미소 짓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어미닭!"
그랬다. 내가 씹고 있는 이 닭은 눈에 초점 없이 방황하던 병아리들의 어미였다.
내가 닭다리만 3개를 먹었으니 최소 두 마리의 어미닭이 목숨을 잃었다는 계산이 나왔다. 어미닭 한 마리가 병아리 다섯 마리를 케어한다고 했을 때 적어도 열 마리는 앞으로 고아로 자라야 했을 것이다. 가정 파탄의 주범이 된 나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오로지 병아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정도 못쓸놈이었고 친구 가족의 입장으로 또 다른 해석이 머리에 맴돌았다.
"이런.. 내가 이 집 재산을 씹고 있었는데 감사한 줄도 모르고 살았구나.."
집에서 애지중지 키우는 닭을 잡아서 대접해 주신 친구의 어머님께 늘 감사하며 지냈어야 하는데 며칠이 지나자 감사가 딱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감사는 했지만 밥 해준 엄마나 이모한테 느끼는 감사 정도로 여기며 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이곳에 손님으로 왔으니 딱히 하릴없이 쉬고 밥 먹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지내고 있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더니 내가 그 멍청이였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몰려왔고 친구 어머님을 볼 낯이 없어졌다.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고 깜깜한 흙집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소똥 바닥에 누운 나는 불편하고 미안한 긴 밤을 보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시장에 가서 설탕 2포대를 사 왔다. 뜬금없는 설탕 세례에 연신 손사래 치는 어머님께 ‘아니라고 그동안 너무너무 감사했다’며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또 다른 닭이 목숨을 잃기 전에 일찌감치 친구 집을 떠났다.
살면서 지금까지 반복되는 호의를 진짜 권리라고 생각하는 최악의 사람은 몇 명 보지 못했다. 있더라도 이미 사회적 죽음을 맞이하여 전설의 빌런으로 안주거리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권리까진 아니어도 호의에 대한 감사를 깨닫지 못하고 밋밋하게 지나가는 경우는 종종 발생한다. 나름 상대방이 나를 생각해서 손해를 감수하며 선의를 베풀었건만 그걸 호의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꽤나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도에 따라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일 일 것이다. 난 그 사건 이후로 '고마우면 고맙다 미안하면 미안하다' 느낀 감정을 표현하려 애쓰고 있다.
직장에서 우리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을 해본다. 직장이라는 게 대게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의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계급장에 단이 하나 더 쌓일수록 혹은 직급이 하나 더 올라갈수록 자연스럽게 후배들의 호의를 얻게 된다. 나 대신 몸을 움직여 물건을 집어오는 사람이 생기고 문 10번 열고 들어올 일이 있으면 8번만 열어도 2번은 앞서 문을 열고 기다려주는 후배를 만나게 된다. 월급도 나보다 적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내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은 ‘지금 이 길을 앞서 걸어온 선배에 대한 존중과 존경’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고로 호의는 권력에 수렴될 수 없다. 그럼에도 갑질로 사내망 사고사례 건으로 오르내리는 선배님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간다 친구집으로 초대를 할 수도 없고.
뭐 아무튼 경험이 재산이라고 하지 않나. 난 요즘도 닭볶음탕을 보면 우간다의 병아리들이 떠오른다. 그러곤 혹시 감사한 일을 당하고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하게 된다. 일종의 PTSD인데 좋은 의미의 정신병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좋은 사람들이 주변을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하고 있으니 경험이 진짜 재산이 된 격 아닌가. 혹시 이 글을 읽고 맘에 서운함이 있는 친구가 있다면 부디 연락 주오. 털고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