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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May 21. 2019

완벽한 조심의 결과

때로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오히려 힘이 돼 


“Come with me.”


단호한 말 한 마디에 입을 꾹 다물었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겠구나, 하고 직감했지. 입국 심사관은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용히 손짓했어. 그러고는 앞장서서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거야.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길고 긴 줄을 기다리던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 미국 입국 심사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야. 


낯설디 낯선 시애틀 공항을 얼마나 걸었을까. 입국 심사관은 나를 작은 방 안으로 들여 놓더니 말 한 마디 없이 휙 가버렸어. 방 안에는 총을 소지한 경찰들이 너댓 명 앉아 있었어. 다짜고짜 여권을 빼앗더니 네 이름을 부를 때까지 얌전히 인터뷰 순서를 기다리라는 거야. 그래, 바로 그곳이었어. 입국 심사 중에 어딘가 신원이 불확실해 보이는 여행객을 데려가 심층 인터뷰를 받게 하는 곳, 말로만 듣던 세컨더리 룸이었지. 


자그마치 80일이야. 계절이 적어도 한 번은 바뀌는 시간, 가만히 누워만 있던 갓난아기가 어느덧 뒤집기를 성공할 때까지의 시간, 심지어 누군가의 소설 속에서는 세계일주까지 이루어졌던 시간, 바로 내가 낯선 도시에서 홀로 머무르게 될 시간이었어. 

상상해 봐, 그야말로 <80일 간의 포틀랜드 일주>를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이 어땠을지. 부산스럽게 짐을 싸는데 모든 것이 눈에 밟혔어. 어디 무인도에 가는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단단히 준비해야만 할 것 같은 거야. 안 그래도 자잘한 걱정에 이미 익숙했던 나는 체크리스트까지 만들어 가며 여행 준비에 열을 올렸어. 아프면 어떡하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걱정의 가지는 끝도 없이 뻗어나갔고, 캐리어는 온갖 자잘구레한 물건들로 점점 더 무거워졌지. 혹시나 잠자고 있던 충치가 있을까 치과 검진도 받고, 하필 떠나기 일주일 전 생긴 상처가 덧날까 피부과도 다녀오고, 혹시나 현지 화장품이 맞지 않을까 쓰고 있던 화장품들을 몇 개 더 사서 쟁이고, 혹시나 도둑이 들까 아마존에서 휴대용 도어락도 알아보고, 혹시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햇반과 고추장을 챙기고, 국적도 얼굴도 모를 누군가가 수도 없이 거쳐갔을 침대가 마뜩잖아 홑이불까지 새로 빨아서 우겨 넣었어. 드디어 공항에 도착해서는 약국으로 달려가 구내염 연고를 샀을 정도였지. 혹시나 입병이라도 나면 맛있는 음식을 맘껏 먹지 못할까 봐. 


하지만 언제나 그래. 문제라는 건 미처 바빠 걱정하지 못했던 것에서 일어나지. 그래, 입국 심사였어. 미국 입국 심사가 더욱 까다로워졌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거기까지는 걱정하지 못했던 거야. 사실 나는 심사관의 의심을 살 만한 조건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었는데도. 

'혼자' '길게 체류하는' ‘젊은 미혼' ‘여성'인 나는 경유지였던 시애틀 공항에서 한참을 머물러야만 했어. 한국에 꼭 돌아갈 거야! 미국에 눌러 앉을 생각은 요만큼도 없어! 허튼 짓 안 하고 얌전히 있다가 갈 거야!를 어떻게든 증명해야만 했거든. 세컨더리 룸의 공기는 한없이 무거웠어. 같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

 

"왜 하필 포틀랜드야?"

"이 작은 도시에서 그 긴 시간을 뭐 하고 보내려고?"

"그럴 만한 돈은 가지고 왔니?"

"여기 아는 사람은 있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장시간 비행에 가뜩이나 피곤한데 마음까지 지쳐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알아봐야 하나 싶던 순간, 한동안 들떠 설레던 마음의 불빛이 탁 하고 꺼지려던 순간, 여권에 드디어  쾅! 하고 도장이 찍혔어. "이해해 줘. 이게 내 일인걸." 하는 말이 뒤따라왔지. 


그게 바로 첫날이었어. 입국 심사조차 준비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던 날. 한편으로는 그나마 캐리어에 미리 챙겨 온 물건들이 참 든든했던 날. 하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하듯 '거기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었어. 바리바리 가져 온 대부분의 것들은 현지에도 모두 있었고, 심지어 더 싸고 좋을 때도 많았어. 꼭 필요하겠지 생각해서 굳이 챙겨왔지만 전압이 달라 아예 작동을 안 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오히려 한국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던 물건들의 필요가 자주 커졌지. 

여행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래. 나는 참 자주 당황했어. 굳이 문제에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아무리 철저히 준비를 해도 조심 경보는 언제나 갑작스레 내려졌어. 크고 작은 문제에 자주 부딪히면서 자신감은 점점 사그라들었지. 기대보다는 두려움으로 여행지에서의 아침을 맞이한다는 거, 생각보다 비참한 일이더라. 


<You Can't Be Too Careful!>, Roger Mello, Daniel Hahn, 2017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줄게. 언젠가 읽었던 그림책의 이야기야. 하얀 장미를 아끼고 아끼던 정원사가 있었어. 안전한 울타리 안에 두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지. 혹시나 사라질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어. 정원사는 마치 습관처럼 중얼거렸어. 

조심하자, 조심해! 아무리 더 조심해도 부족해!


하지만 언제나 그래. 문제는 미처 걱정하지 못했던 것에서 일어나지. 갑자기 휘몰아친 바람이 문제였어. 거센 바람에 그만 빨랫줄이 날아간 거야. 뒤늦게 줄을 잡으러 간 정원사는 신발을 잃어버리고 말아. 정원사의 신발을 숨긴 건 다름 아닌 고양이였고, 그 고양이는 정원사의 남동생이 주었던 선물이었지. 동생의 부인이 삼촌에게 물려 받았던 고양이였어. 부인의 삼촌은 결코 도착하지 않을 러브레터를 기다리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사람이었고, 그 러브레터는 어떤 우체부에게 전해지는데……. 이야기는 이렇게 아주 사소한 연결 고리들을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러다 어느덧 다시 정원사와 장미가 그 주인공이 되었을 때, 어디선가 또 거센 바람이 불지. 내가 이미 우려했던 일이군. 이번엔 꼭 조심하겠어! 정원사는 빨랫줄이 걸려 있는 곳으로 당장 뛰었어. 그리고 잠시 후 정원사가 돌아왔을 때, 하얀 장미는 온데간데 없었단다. 



영 개운치 못한 결말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나 애써 지켜 왔는데 딱 한 번 한눈을 팔았다고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다니, 긴긴 시간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과 여러 상황들이 이 비극을 위해 차곡차곡 설계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혼자 그렇게나 열심을 내다니, 정원사를 보는 마음이 어쩐지 아프게 쓰렸어. 완벽히 조심한다는 건 결국 불가능한 명제인 걸까.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더라.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고작 지금 내 손 안에 있는 현재의 시간뿐일 때가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금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대답하고, 지금 사라질지도 모르는 빨랫감과 신발을 잘 챙기는 것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어. 그래서 가끔은 생각한다. 우리는 생각보다도 더 작은 존재구나, 겹겹이 쌓인 시간의 관계에 순응할 도리밖에 없는. 

그런데 참 이상하지. 때로는 할 수 없다는 말이 오히려 힘이 돼. 어떻게든 완벽하게 대비를 해야 해! 마음을 더 조여매고 더 긴장해도 모자라! 하는 이야기를 읽었더라면, 매 순간 하얀 장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노력하고 노력하던 정원사가 그 열심 덕에 마침내 장미를 지켜내는 결말이었더라면 오히려 힘이 빠졌을 거야. 


사실 이곳에 오면서 크고 작은 고민들을 먼 이후로 미뤄두었어. 어떻게든 되겠지, 무책임한 말을 순간의 용기로 포장하면서. 하지만 문득 초조해질 때면 기껏 미뤄둔 걱정들을 다시 가져오게 돼. 그런 걱정들은 꼭 가장 즐거운 순간에 불쑥 찾아오지. 진짜 이래도 되나? 하면서. 아니, 생각해 보면 굳이 순간을 가리는 것 같지도 않아. 어떤 일에 열심을 내다가도 문득 막막해질 때가 있거든. 정말 이게 맞나? 하면서.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럴 때면 쪼그라든 마음을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워야 해. 다시 한번 상상해 보는 거야. 타인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면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해 줄 것인지. 그럼 스스로에게 약간 미안해져.

생판 남이라도 그렇게까지 다그치지는 않았을 거면서, 혹시나 마음이 상할까 이런저런 말을 골랐을 거면서, 잘 하고 있어! 천천히 가도 괜찮아! 같은 진부한 격려를 잘만 했을 거면서, 왜 막상 나 자신에게는 조금의 예의나 배려도 없었던 것인지. 



희뿌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다음 시간을 매 순간 맞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전혀 모르는 채로, 이름도 얼굴도 모를 누군가가 내게 어떤 연결 고리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지만 씩씩하게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다면, 80년이 넘도록 반복될 삶의 불확실성에 매일 직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너 참 용기 있는 사람이구나, 하고 말해 줄 거야. 


그러니까, 수고했다고 말해 주고 싶어. 오늘을 마친 나에게, 두려운 내일을 또 맞이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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