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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May 21. 2019

각자의 몫

얼마나 찬란한 여름이 오려고 



포틀랜드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재주가 있어. 사람의 손길이 직접 닿은 물건은 바로 알아보고 기분 좋은 말을 건넨다는 거야. 필요한 것이 생기면 무엇이든 직접 뚝딱 만들어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스스로 정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는 일이 보편적인 취미인 사람들이라,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창조해 내는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라서. 지갑을 꺼내느라 분주한 계산대 앞에서도, 길을 걷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거리 한복판에서도, 어쩌다 마주 앉은 도서관 책상 한 켠에서도 어딘가 특별한 물건이 눈에 띄면 스스럼없이 칭찬을 건네곤 해. 


"네 시계 참 예쁘다!"

언젠가 홍대 앞 벼룩시장에서 샀던 수제 손목 시계였어. 나는 멋쩍게 대답했지. 

"하지만 배터리가 다 되었는걸."

이어지는 대답에 나는 잠시 황홀해졌어. 

시간을 알려주는 팔찌를 가졌네. 멋지다!



문장 하나 때문에 몇 번이고 다시 보는 책이 있어. 건조한 문장의 숲을 힘겹게 지나치다가도 마음을 축일 만한 문장을 하나라도 만나면, 그나저나 참 좋은 독서였다면서 기뻐하게 돼. 또 어떤 음악이 있어. 녹음의 문제였는지 잠시 한숨이 함께 섞인 노래. 나는 그 부분이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다시 듣곤 해. 그리고 또 어떤 영화가 있어. 지지부진한 전개에 속이 타다가도 누군가의 대사 한 마디에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받게 되는, 그때 그 말의 온도와 분위기와 속도가 참 좋아서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되는 영화. 그리고 또 어떤 시계가 있어. 배터리가 다 되어서 시침과 분침이 제자리에 멈춰 버린 시계. 그래도 하루에 딱 두 번은 정확해지는 시계. 


신기한 일이야. 수 천 개의 문장 중에 딱 하나가 기억에 남았을 뿐인데, 오백 초가 넘는 시간 중에 고작 삼 초 남짓의 마디 하나가 마음에 들었을 뿐인데도 그 전부를 내가 좋은 책, 내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기억하게 돼. 부지런히 흘러가는 시퀀스 중에 딱 하나의 음성이 위로를 주었을 뿐인데 그 모든 장면들이 다정해져. 하루에 두 번 정확한 시간을 가리킬 뿐인데 그래서 나에게 더욱 소중한 팔찌가 되고.




여름의 포틀랜드는 해가 열 시까지 떠 있어. 한낮에는 찬란한 햇살이 빛나고 저녁에는 노을이 밝게 붉은 장막을 드리우지. 온 도시에 활기가 넘쳐. 모두가 한목소리로 날씨 정말 좋을 때 왔구나! 반기는 이유가 있더라니까. 심지어 출국 전에 애플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을 때도 그랬어. 어디로 가시냐기에 포틀랜드라고 했더니 수화기 건너 목소리가 한층 밝아지는 거야. 와, 정말 좋을 때 가시네요! 


사실 포틀랜드는 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고 자주 비가 내리는 도시야. 오로지 여름에만 반짝 화창하게 햇빛이 드는 곳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희뿌연 안개로 맞이하는 아침이 계속될수록, 비 오는 매일이 이어질수록 짐짓 기대함으로 버틴대. 얼마나 찬란한 여름이 오려고,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계절이 오려고, 하면서.


여름 밤의 포틀랜드


정말 좋은 계절이야. 모두가 좋아 보여. 초록빛으로 물든 공원에는 느긋하게 누워 햇살을 받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모래가 반짝거리는 해변가에는 이 여름을 즐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바글거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다음 걸음을 준비해야 하는 곳이었어. 대책을 미루고 떠나왔으니 뭐라도 다른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베이스캠프였다는 말이야.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시간을 흘려 보낼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어. 굳이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사치라면서, 좁은 도시에 오밀조밀 모여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특권이라며 부러워했지. 이미 수많은 시간을 낭비해 왔으면서도. 


자주 초조해져. 짧은 시간 뭐라도 더 많이 하고 가야 할 텐데! 여기까지 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하면서. 오늘 하루도 그저 손에 쥔 모래처럼 허무하게 흘려보낸 것은 아닐까, 한심한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있잖아, 그럴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도 될까? 내가 좋아하는 문장과 한숨과 대사와 시간을 기억하는 거야. 겨우 두 번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는데도 제 몫을 다했다며 사랑받는 시계를, 스산한 바람과 우중충한 공기를 매일처럼 견뎌야 하는데도 잠시 빛나는 여름이 있어서 아름답다고만 기억되는 도시를 새기는 거야. 

그렇게 또 마음을 정할 거야. 스물 네 시간 중에 한 순간이라도 잘한 일이 있다면 오늘 하루는 그것 하나로 내게 좋은 날이 될 거라고. 포틀랜드에서의 수많은 여름날 중에 하루라도 마음에 드는 성취가 있었다면 이 여행은 그 하루 하나로 꽤 괜찮은 기억이 될 거라고. 


그런 순간이 올 거야. 언젠가 그 몫을 충실히 다해 낼 순간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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