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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May 22. 2019

나의 영토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 




개강을 했어. 이 단어를 대체 얼마만에 쓰는지. 내일부터는 포틀랜드 주립 대학교에서 여름이 지날 때까지 짧은 클래스를 듣기로 했어. 사실 영어를 더 배워 보겠다거나 다양한 국적의 친구를 사귀어 보겠다거나 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지. 그래,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거든. 세 달 여의 시간을 호텔에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누군가의 집을 빌려 살자니 겁이 났어. 


포틀랜드에 도착했던 첫날 밤, 호텔 방문의 걸쇠를 걸어 잠그고는 바깥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었는지. 불을 끄고 겨우 침대에 눕는데 머릿속에 온갖 걱정이 꼬리를 물었어. 혹시나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의료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이곳에서 혹시나 다치기라도 하면? 혹시나 누군가 흉기를 들고 위협이라도 하면? 희뿌연 안개처럼 막연한 걱정이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어. 스스로의 보호자가 된 나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것. 이 낯선 땅에서 의지할 만한 대상이 고작 나라니! 막힘없이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이 아주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힘이 무지하게 센 것도 아닌 나에게 나를 맡겨야 하다니! 아무래도 헐거워 보이는 호텔 방문에 달려 있는 걸쇠가 차라리 든든할 지경이었지. 나는 걸쇠가 잘 잠긴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후에야 잠이 들 수 있었어. 


이튿날, 고맙게도 아침이 밝았어. 햇살이 닿으니 무섭게만 보이던 것들이 조금은 친밀해지더라. 서늘한 냉기에 한껏 몸을 웅크려야만 했던 침대도, 어쩐지 누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아 감히 열어 보지도 못했던 옷장도, 불빛 하나 없이 캄캄했던 창 밖의 풍경도. 빳빳하게 잘 마른 호텔 침구의 감촉이 좋아서 한동안 파묻혀 있다가 몸을 일으켜 커튼을 걷었어. 초여름의 해가 비치는 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해 보였지. 옷장에 바리바리 싸 온 짐들을 넣어 두고 나니 비로소 여행지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어. 어서 거리에 나가 새로운 세계를 즐기고 싶은 거야. 참 신기하지. 생각해 보면 낯섦이 주는 두려움과 설렘은 딱 햇살 한 줄기만큼의 차이인 것 같아. 낯설어서 모든 것이 두렵게 느껴지다가도 어느새 낯설어서 설레는 순간이 오기도 해. 딱 햇살 한 줄기만큼의 변화가 있었을 뿐인데. 

한결 마음이 편해진 나는 즐겁게 외출 준비를 마쳤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텔 방을 나서는데, 문을 닫는 순간 ‘철컥!’ 하는 소리가 났어.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 아뿔싸, 문을 너무 세게 닫은 탓인지 방문의 걸쇠가 안에서 잠겨 버린 거야. 걸쇠가 걸려 버렸으니 내 힘으로는 다시 문을 열 길이 없었어. 암만 카드 키를 가져다 대도 꿈쩍도 않더라. ‘철컥!’ 하는 불쾌한 소리만 날 뿐. 


나는 우물쭈물 프론트 데스크로 향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바쁘게 준비한 영어 문장을 늘어 놓는데,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은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흔쾌히 몸을 일으켰어.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며 안도의 숨을 쉬었지. 생각보다 일이 꽤 잘 풀리는 것 같았거든. 그런데 다시 내 방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글쎄 온몸이 얼어붙었어.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난 거야. 


건장한 남자 직원의 손에는 비상 열쇠도, 마스터 키도 들려 있지 않았어. 그저 방문에 ‘쿵!’ 하고 몸을 부딪혔을 뿐. 굳건했던 방문은 너무 허무하게 열려 버렸어. 직원은 바닥에 떨어진 걸쇠를 줍더니 다정한 인사를 건넸지. 이건 나중에 다시 달아 줄게! 좋은 시간 보내! 

나는 금세 공포에 질렸어. 배신감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해. 어젯밤 내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걸쇠가 이리도 허술했다니! 이 호텔의 방은 성인 남자가 그저 몸을 좀 세게 부딪히면 누구나 들어 올 수 있겠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금 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어. 밖에서 약간의 소음이라도 들릴라 치면 움찔거리며 쪼그라들었지.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들이닥칠 것 같았거든. 


문제의 걸쇠!



그래,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어. 약간의 울타리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곳.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숙사 같은 곳에 머무르고 싶었던 거야. 까짓 거 영어도 배워 보고,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도 사귀어 보지 뭐! 하는 생각도 아주 조금은 한 것 같아. 

기숙사로 이사한 후에는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청소만 했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깔끔을 떨었다고, 허리가 아프도록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쓸고 닦았어. 언제부터 이렇게 부지런했다고, 마트로 달려가 커피 포트며 드라이어며 당장 내일 먹을 아침이며 바리바리 장을 봐 왔고. 조금이라도 튼튼하게 문을 지켜줄 만한 자물쇠를 몇 개 사 두는 것도 잊지 않았지. 그렇게 또 한참을 정리한 후에 천천히 방을 둘러보는데 그제야 맘이 좀 놓였어. 한국에서 일부러 가져 온 디퓨저를 놓아 두자 익숙한 향기에 드디어 마음이 뿌듯해졌어. 호텔에 잠시 짐을 풀어 놓을 때랑은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지. 잠깐이지만 내 손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는 거야. 


낯선 도시에 그나마의 내 영토가 있다는 게 이렇게나 안심이 되는 일이었구나. 


창밖의 풍경이 참 예뻤던 기숙사의 방




세상에 둘도 없는 겁쟁이가 새로운 도시를 여행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한 스스로를 데리고 낯선 세상에 떨어진다는 건 너무나 불안한 도전이지. 그런데 말야, 부족한 스스로와 함께하는 여행이 주는 감정들은 딱 햇살 한 줄기만큼의 차이인 것 같아. 겁쟁이인 나 자신이 너무 못 미더워서 모든 것이 두렵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고마워져. 어떻게든 마음을 놓으려고 내 영토를 만들고, 어떻게든 다치지 않으려고 구석구석 온 신경을 기울이는 나에게. 그 서투른 노력이 참 고맙게 느껴질 때가 있어. 


그래, 그게 중요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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