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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Jan 25. 2021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겠니

눈앞에 어떤 풍경이 있었는지. 어떤 냄새가 났고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



오랜만에 책이 가득  배낭을 맸어. 오랜만에 필통과 노트를 챙기고, 간만에 느껴 보는 긴장감이 어색해서 괜히 어깨를 한번 들썩였지다시 학생이 된 거야. 참 오랜만에. 


포틀랜드 주립 대학교의 공원


여행 한 달째, 넘쳐나는 시간이 슬슬 부담스러워질 무렵이었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시간이 오히려 숙제처럼 느껴지던 참이었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정으로 하루를 채울만 한 의지는 없는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왜인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어. 자유를 빼앗겨도 상관 없으니 누군가 하루 일과를 대신 계획해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

 

마침 그러던 참에 학생이 된 거야. 얼마나 즐거웠을지 상상이 되니? 나는 꼬박꼬박 시간표를 따랐어. 아주 충실히 그 시간들을 실행했지. 시간표에는 매일 한 시간씩 약속을 잡아서 튜터와 대화를 하는 시간도 있었어. 대부분의 친구들은 부담스러워 피하는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그것마저 즐거웠어. 어쨌든 그 시간을 마치고 나면 꽤나 뿌듯한 감정이 찾아왔거든.


대화의 주제는 아주 다양했어. 튜터 제니퍼는 언제나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을 던졌어. ‘예, 아니오’로는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질문들을 끝없이 건넸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침묵이 흐르면 어디선가 카드를 한 다발 가져왔어. 생각지도 못한 대화의 주제가 낱장마다 적혀 있는 카드였단다. 좋아하는 영화 장르를 묻는 사소한 질문부터 사후 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심오한 질문까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제가 가득했어. 마음 같아서는 한국에 챙겨가고 싶더라니까. 신입사원 환영회라던가 오랜만에 먼 친척까지 한 자리에 모인 명절, 어색한 침묵이 맴도는 소개팅 같은 때에 아주 요긴할 것 같았거든.


있잖아, 누군가와 그렇게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은 처음이었어. 사실 관계라는 것은 참 신기해서 굳이 일부러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나 비슷한 이야기를 맴돌기 마련이잖아.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어떤 관계에서는 특정한 주제의 이야기를 더 편하게 나누게 되지. 사소한 일상의 사건들을 재잘재잘 떠드는 것이 편한 친구가 있고, 과거나 미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친구가 있는 것처럼.

 

그런데 제니퍼와의 대화는 조금 특이했어. 첫 인사를 나눈 지 몇 주도 안 된 시간에 서로의 드라마 취향과 사후 세계에 대한 철학을 알게 된 거야. 하다하다 어렸을 적 가장 창피했던 기억까지 말하고 나니 이제는 왠지 무엇이든 이야기해도 될 것 같더라. 나는 나도 모르게 불쑥 물었어. 그러고는 스스로 흠칫 놀랐지.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실제로 던져 본 것은 처음이었네. 사실 그럴 만한 관계가 없기도 했어. 친구에게 던지기에는 너무 진지했고, 업무로 만난 작가에게 던지기에는 너무 본격적이었고, 엄마에게 던지기에는 뜬금없었으며, 동료에게 던지기에는 부끄러운 질문이었거든. 하지만 제니퍼는 꽤나 적절한 대상이었어. 머나먼 미국 땅에서 잠시의 인연으로 만나 온갖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눠 온 사람이라니, 이보다 알맞은 대상이 또 있을까!


“글쎄, 글을 잘 쓰려면 우선 묘사를 잘 해야 해.”

제니퍼가 말했어.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한참 무언가를 고민했지. 그러고는 말을 이었어.

“묘사한다는 건 사진을 찍는 것과 같아.”

제니퍼는 또 한참 말이 없다가 덧붙였어.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좋은 묘사를 하려면 기억을 잘 해 두어야 해.”

제니퍼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생겼어. 그렇게 또 한참을 있다가 말했지.

“무언가를 제대로 묘사하려면 그때 나의 다섯가지 감각이 어땠는지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해.”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어.

그 순간을 기억할 수 있겠니? 눈앞에 어떤 풍경이 있었는지. 어떤 냄새가 났고 무슨 소리가 들렸는지, 입 안에서는 어떤 맛이 났고 피부를 스치는 그것은 어떠한 느낌이었는지.”


말하자면 순간을 충실하게 기억하라는 거야.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사진으로 포획하는 것처럼,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몸의 모든 감각으로 저장해 두라는 거야. 그렇게 감각으로 차곡차곡 기록해 둔 순간들은 특별한 추억이 돼. 잠시 흐릿해졌다가도 감각을 되새기면 그때의 순간이 새롭게 깨어나는 거야. 뿌연 먼지가 앉은 사진첩이 오래된 기억을 깨우는 것처럼.


오늘 아침 경험했던 순간


매일 아홉시, 수업 가는 길은 이제 막 부서지는 햇살에 예쁘게 빛난다. 서늘한 오전의 공기에는 풀 내음이 함께 스치고, 저 멀리서는 저벅저벅 바삐 걷는 발 소리, 반갑게 인사하는 말 소리. 아침 대신 리콜라 허브 캔디를 하나 물고 나왔더니 입을 움직일 때마다 사탕이 달그락거린다. 약간 맵지만 기분 좋게 상쾌한 허브맛.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햇살을 받아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늘에 들어서면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가, 다시 햇빛이 내리쬐면 적당히 따스한 온기에 마음이 푹 놓였다가.


오늘 아침 경험했던 순간을 너에게 보낸다. 포틀랜드에 머무르는 동안은 조금 더 자주 연습하려고 해. 머리로는 언젠가 쉽게 잊을 기억, 감각들은 좀 더 오래 기억하도록. 언젠가 이곳이 눈물이 날 만큼 그리워졌을 때, 언제고 흔들어 깨워 꺼내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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