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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Feb 16. 2021

그대로인 것 같아도

넌 나아가고 있단다

우리는 언제부터 기다림에도 시간을 재게 된 걸까. 버스 어플을 보면서 기다릴 시간을 계산하고, 구글 맵을 보면서 지금 나의 위치를 확인한다. 얼마나 기다려야 이 정류장을 떠날 수 있을지,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는지, 대체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 내가 계획한 모든 여정을 손바닥 위에 두고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거다.


그래서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내 삶을 대할 때에도 버릇처럼 자꾸만 시간을 재게 된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언제쯤 원하는 곳에 도착하게 될 지. 하지만 도착지는 도무지 보이지 않고 낯선 길만 아직도 갈래 갈래 뻗어 있으니 - 문득 아득해진다. 그럴 때마다 맘에 두는 노래 가사가 있다. 걱정 말아라, 너의 세상은 아주 강하게 널 감싸안고 있단다. 나는 안단다, 그대로인 것 같아도 아주 조금씩 넌 나아가고 있단다. (스웨덴세탁소, <두 손 너에게> 중)



언제부터 모든 순간을 정확한 숫자로 가늠하려고 했던 걸까. 도착 알림판이 고장났다고 다음 버스가 안 오는 것도 아니고, 구글 맵이 없다고 지금 내 앞의 풍경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봄이 온다고, 맑게 갠 하늘이 온다고, 찬란하게 빛날 그 언제가 온다고, 소중한 누군가가 내게 온다고 ‘잠시 후 도착’이라는 알림이 뜨는 것도 아닌데. 숫자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 아직은 더 많은데. 나를 지지해주는 나의 세상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강하게 나를 감싸안고 있는 그 사랑이 얼마나 단단한지 정확한 수치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 마음을 놓고 다시 오늘을 살자. 어쩌다 바람이 불면 아주 조금씩 나아가는 구름처럼, 매일 밤 아주 조금씩 제 세상을 넓혀가는 달처럼. (Feb1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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