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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Feb 02. 2021

나는 네가 도망갈 줄 알았지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아, 이제 울겠구나 했어. 보니까 네 표정이 딱 그런 거야. 무대 위에 네가 혼자 올라가니까 탁 하고 불이 꺼지데? 무대 앞에는 사람들이 아주 바글바글하고. 다들 저 꼬마애가 이제 어떻게 하나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는 거야.”


젊었던 아빠와 두 살의 나



“그래, 너 일곱 살 때. 영어로 시편 23편을 모두 암송해야 하는 거였어. 숨소리 하나 안 나고 다들 너만 바라보는데 아이고 우리 딸 울겠구나 했지. 뭐가 되게 무섭고 불안할 때 나오는 네 표정이 있어. (아니, 너는 몰라. 아빠는 알지.) 벌써 울먹거리길래 저거 무대에서 내려오겠구나 했는데 웬걸, 그 표정으로 또박또박 첫 문장을 시작하는 거야. 나는 네가 도망갈 줄 알았지. 근데 해내더라더니까. 너는 안 그럴 것 같다가도 무섭게 단단할 때가 있어. (아니, 너는 몰라. 아빠는 알지.) 아무튼 기특했다고, 우리 딸."



어느 날 아빠가 식탁에서 툭 하고 꺼냈던 이야기. 아빠는 아마 모를 거다. 밥 먹다 우스개로 툭 던졌던 이야기, 나는 모르고 아빠는 알았다던 그 이야기가 내 마음에 꽤나 오래 남았다는 걸. 심지어 마음 한 켠에 잘 심겨서 싹을 틔웠다는 걸, 가끔씩 내가 아주 무섭고 불안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마음을 지탱할 수 있는 나무가 되었다는 걸,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 싶을 때 기어코 버텨내도록 뿌리를 내렸다는 것도.


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스스로 생각한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지만 너는 그 표정으로 또박또박 다시 걸음을 시작할 거라고. 무대에서 도망칠 것 같다가도 무섭게 단단해져서 준비한 걸 어떻게든 끝마칠 거라고. 지금의 너는 모르겠지만 일곱 살의 너는 아마  알고 있을 거라고. (Feb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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