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5
제주에서 게스트하우스 스텝을 하며 제주 책방 여행을 다녔다. 제주에 머물 시간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가까운 거리에 책방이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연애편지를 쓰듯 책방을 언젠가 열고 싶은데, 혹시 짧은 시간이더라도 무보수 아르바이트를 해볼 수는 없겠느냐고 열정 페이를 제안했다. 현명한 책방 사장님은 잠깐이더라도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을 것 같다며, 아직 운영을 시작하지 얼마 되지 않은 책방이라 그 조건은 부담스럽다고 조심스럽게 거절해주셨다. 대신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 책방에서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접근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사장님을 북페어에서 보아도 쉽사리 알은체 할 수 없었다. 사장님은 나와의 만남을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본투비 소심쟁이인 내가 앞서 나갔다는 생각에 다시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주도에 갔을 때 다시 방문해 나를 잊은 것 같더라도 책 한 권 사 왔을 텐데. 이제 그 서점은 며칠 뒤 완점을 앞두고 있다. 그때 사장님과 나눈 대화는 많이 잊혔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겠다고 되새기는 조언이 있다. 서점을 열기 전 '나만의 필살기'를 만들어두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필살기를 갖춘 채로 서점을 열었는가? 여성작가와 여성 서사를 다루는 책방이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해박하지 않다. 아주아주 넓은 범위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큐레이션 하는 서점이라고 불릴 수는 있겠지만 이 도서들이 전부 페미니즘 코너에 들어가는 책들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창구를 만들어둠으로써 여성작가의 도서를 소비하는 독자들의 거름망 역할쯤은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책방에 가더라도 페미니즘 도서는 책장 하나만 차지하고 있을 때 나의 책방을 떠올리는 초라한 의식. 여성의 목소리가 이 시대의 대중적인 흐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 바람과 책임질 만한 건물 월세, 응원해주는 동네 책방 사장님들을 믿고 시작한 일이다. 이런 나에게도 '과거 제주의 나' 같은 손님이 찾아오기도 한다. 나처럼 책방을 하고 싶은 예비 사장님들. 아무래도 결이 비슷할 수밖에 없는 분들. 나는 어떻게 책방을 하게 되었는가. 그때마다 되짚어 보자면, 제주 책방 여행을 다니고 달마다 가기 좋은 서점을 브런치에 추천하고, 서점 가는 영상을 브이로그로 편집해 유튜브에 올렸다. 이런 모든 기록은 실제로 독립서점에 방문했을 때 받는 아늑한 기운, 보물을 찾을 것만 같은 기분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운이 더해져 시기가 다소 많이 앞당겨졌고 투잡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코로나만 아니라면 서점에서 여는 워크숍들을 왕왕 참여하라고도 말한다. 제주에서 앞뒤 없이 말을 건 건 곧 제주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점 사장님들은 서점에 서서히 스며드는 단골손님에게 서점 운영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을 것 같다.
경험치가 부족한 내가 한 가지 믿는 건 오래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절대법칙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게 온전히 나의 의지로만 된 것이 아니듯 떠나는 날 또한 불가피함에 의지를 더해보자는 수동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다. 경우의 수는 고령의 건물주 할머니와 재개발 단지 논의가 벌어지는 이곳의 특수한 상황이 있다. 그러다가도 언제든 이곳을 떠날 날을 생각해본다. 오락가락하는 서점 주인의 마음은 생각보다 편안하지 않다. 서점에 점점 쌓이는 이 책들을 짊어 메고 떠날 다음 스텝을 생각하기도 하고. 음, 일단 미뤄두던 재고 정리부터 하자. 서점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약이 있다면 꿀꺽 삼키고 싶다.
그 약은, 아마도 책방에 나와 빗질을 하고 책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환기를 시키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1일 1회 복용을 하지 않으니 이따금 딴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