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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Jan 31. 2022

책 덜어내고 채우기

내방헌책장-1

  책장이 왔다. 주문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이 정도 사이즈는 우리 집 중문을 통과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제작은 시작했을 테고, 취소할 수도 없는데 어떡하지. 그때는 다시 책방을 할까 고민했던 때라 책방으로 책장을 들이는 그림도 잠깐 상상해봤다. 아주 잠깐이었고 책방은 다시 열지 않기로 확실히 마음을 다잡았다. 책장이 오던 날 걱정했던 중문은 기사님이 떼어주셔서 잘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라 기사님과 끙끙대며 계단을 올랐다. 계단 중간쯤에서 기사님이 물었다.

  "도와줄 사람 없어요?"

  그 말은 '도와줄 (남자) 없어요?'로 들렸다. 도와줄 사람은 없고 팔 근육통을 얻었지만 그런대로 해냈다. 비슷한 물음을 엄마에게서도 들었다. 겨울을 맞이해 창문에 단열재를 붙인다고 엄마에게 말했더니, 그런 거 도와줄 '남사친' 하나 없냐고 물었다. 단열재를 처음 붙여보긴 했지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래도 노하우 같은 게 있는지 엄마에게 물었더니 한 번도 붙여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사를 그렇게 다녔으면서 단열재 한 번 붙여 본 적 없다는 게 남사친 없는 것보다 더 충격이었다. 하긴, 본가에 있을 때는 조립이 필요한 일이나 힘쓸 일이 생기면 집안의 남자가 해주고는 했으니까 엄마는 안 해봤을 수 있다. 그러니 창문에 물기를 묻히고 붙이기만 하면 되는 일을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집안에 남자 하나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많다고 여겨지는 정상성이 얼마나 여성을 약하게 만드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대학교 앞에서 한 자취 말고 집에 있는 짐을 몽땅 들고 이사를 다니니 조립할 가구도 많고 여름이나 겨울에는 신경 쓸 일들도 늘어난다. 1인 가구로 온전히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 고양이 친구까지 더해져 1인 1묘 가구로 살고 있다.

  함께 사는 친구는 집에 테이블이 바뀌고 책장이 들어오는 게 낯선지 손길을 피한다. 캣타워를 들인다고 방구조도 싹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가뜩이나 예민한 고양이를 더욱 자극시켰다. 너도 나도 적응하는 날을 기다리자고 슬쩍 부담을 나눈다. 책장이 왔으니 다음 할 일은 책방에 책을 덜어내 채우기다. 읽고 싶은 책은 가져오고, 위탁한 책은 돌려보내고 남은 책들은 중고로 팔 예정이다. 책을 집으로 옮기는 게 꽤 고된 작업이고, 이걸 마치면 책방이 조금 휑해 보일 것 같았다.

  웬걸, 읽을 책을 다 빼냈는데도 큰 변화가 없다. 이건 책방에 책이 많아서인지 읽고 싶은 책이 적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아마 후자인 탓이다. 누가 억지로 입고하라고 해서 입고한 책도 아닌데 정작 읽을 생각으로 고르니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놀랐다. 그렇다고 딱히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욕심내서 들고 가기도 피곤하다. 손님에게도 책을 들여놓은 주인에게도 읽히지 않은 이 책들은 무슨 잘못일까. 아무 잘못 없다. 아무 잘못 없는 책들이 어떻게 이 책방에 오게 되었을까. 큐레이션을 한다고 주제를 정해놓다 보니 어떤 손님이 어떤 책을 찾을지 몰라 나의 취향이 아닌 책도 입고했다. 간혹 책을 추천해달라는 손님에게는 그런 책 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이나 읽었던 책을 추천했다. SNS에 소개한 책들도 의무감을 느낀 책보다는 한 명이라도 더 사주었으면 하는 책을 올리는 편이었다. 새로 산 책장에 책을 꽂고 자리가 없으면 책장 위로 쌓으려고 했다. 어이없게 공간이 남는다. 이러니 책방에 손님이 없었지, 잠깐 자조하고 훌훌 털어냈다. 그나마 지금 정리해서 다행이라고, 얼른 다른 할 일을 찾아야겠다고 거의 매일 생각한다. 책방이 아닌 다른 일. 정신과 선생님은 책방을 닫는 이유가 근래 나에게 닥친 일 때문만인지를 물으셨다. 그 이유만으로 닫는다면 울컥 화가 나기 때문에 애써 합당한 이유를 모으고 있다. 주인마저 딱히 갖고 싶지 않은 책을 팔고 있었으니 책방 주인으로 자질이 없었다는 게 증명되었다. 이 책들이 어디로 흘러가든 꼭 누군가의 손에 집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온기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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