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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요가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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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니타 Dec 28. 2021

소심함에 대응한 시간들

아사나를 포기한 순간 진짜 아사나가 시작된다.

 시간은 참 야속한 놈임에 분명하다. 처음 회사를 그만둘 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고 싶었고. 출근의 압박 없이 느지막하게 잠에서 깨보고 싶었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데. 연말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은 무료하다. 시간은 내가 퇴사 기간 동안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던 가치들을 흐릿하게 만들었고, 때론 불안의 씨앗을 키우기도 하며, 별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속절없이 지나가는 상대성도 갖추고 있다. 정말 여러모로 야속하다. 그래서 기록은 중요한 것 같다. 기록하지 않으면 야속함에 까무룩 속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쓰지 못했던 글을 다시 쓴다.


 그럼에도 시간은 나에게 꼭 필요하다. 나는 무언가를 체득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족집게 일타 강의에 익숙해진 자본주의 강남 8 학군의 산물인 나는, 그만큼의 자본을 들일 돈이 없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꾸준하게' 공을 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이것은 나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있는 지독한 습관이다. 꾸준하게 하지 못할 바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병에 걸렸다. 꾸준함은 나에게 느리지만 탄탄한 성장을 주지만, 때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소심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요가를 좋아한다.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일정 이상의 실력을 요구하지도 않지만, 요가에 있어서 달성해야 할 소기의 '목표'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하게 꾸준히 매트 위에 서는 것 만이 우리를 꽃피울 수 있다. 때론 목적지가 없는 길을 걷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고, 중간중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지만 시간으로 공을 들이면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받게 되는 것이 요가인 것 같다.


 지난 한 달간 예기치 못하게 요가 슬럼프가 왔었다. 올해는 꼭 시르시아나를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속되는 실패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매일 속옷까지 젖어가며 하루 2-3시간을 수련에 할애했지만 실력은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포기해버렸다. 누군가 시르시아사나를 하고 있을 때면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눈을 질끈 감고 아기 자세로 휴식을 취했다. 계속 시도하기보다는 소심함을 선택해버린 순간이었다. 스승님은 때론 그렇게 슬럼프가 올 때도 있다며 그럴 때에는 잠시 수련을 멈춰보라고 권유했지만 그저 나는 묵묵하게 나만의 방식으로 매트에 올랐다. 수련의 양적 시간 보단 질적인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 하루에 꼭 한 시간만 요가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여간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마주할 자신 없이 오롯이 내 안에만 집중하며 요가를 했다. 남과 비교하기를 포기하고 경쟁을 내려놓고 내면의 나와 맞서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님이 말했다. '오늘 제가 봐왔던 그 어떤 모습 중에 가장 몸과 마음이 가벼워 보여요.' 숱하게 비교하고 자책하던 마음을 내려놓기 반복한 지 꼭 한 달여가 되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마법처럼 그 어느 누구보다 올곧게 세상을 뒤집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 비법과도 같은 족집게 일타 강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럴 자본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저 내 방식대로 시간을 들이며, 시도에 대한 소심함을 나만의 꾸준함으로 반항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발끝은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가벼워진 것은 중력을 거스르고 있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아사나를 포기한 순간 진짜 아사나가 시작된다.라는 구절을 애런 뱁티스트의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나는 포기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으로 소심함에 대항했을 뿐이다. 앞으로 나는 또 어떤 슬럼프를 겪게 될지 모르겠다. 아직 나의 약점들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또 포기하고 시간을 들여보려고 한다. 이게 내가 살아온 방법이었겠지. 꾸준하게 내가 선택한 불투명함을 의심하면서도 공을 들일 것이다. 남들보다 느리지만 이게 내 인생을 가볍고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먼 훗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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