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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zzy Mar 12. 2022

"다정하게 안녕히"

"시간은 고여 있고" 기억은 흘러 오고

공간은 기억을 데려온다.

생각지도 않은 우연들이 필연처럼

넘나들면서 발이 가는 길마다에서

어떤 시간들을 끄집어내곤 하니까.


편집 디자이너와 회의를 마친 주말 낮,

봄이 온 듯한 기분에 설레어 조금 걸었다.

예전에 살던 동네였으므로

그때의 기분이 떠올랐다.

책을 들고 있던 손으로

횡단보도를 찍었더니

마치 이 책이라는 사물,

혹은 살아돌아온 죽은 저자가

여행을 하는 듯했다.

찻길을 건너 건대 스타시티 지하로 향했다.

반디앤루니스 자리가 교보문고로 바뀌어 있었다.

시집을 사러 들어갔는데,

이상하게 시집 칸이 보이질 않았다.

아직 책을 많이 비치해놓지 않은 것인지,

몇 권 스테디셀러 정도로만 꽂혀 있었다.


한강의 시집을 우선 샀다.

그날 저녁 만날 이에게 선물 참이었는데,

전체적 톤이 너무 음울해,

사고보니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와서,

취향을 잘 모르는 이에게 선물할 책은

아닌 듯해 가방에 넣었다.

약간 출출해 서점 지하 이디야에 들러

잠시 밀크티를 마시곤 그날 선물할 책들을

페이지 읽다 나왔다.

역시 한강. 여전히 이 작가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괜히 고마워지는 이였다.



시집을 들고 전철을 타니, 전날 들렀던

학창 시절 도서관,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마저 못나눈 얘기의 소재를 떠올리며

다시 다른 장소로 향했,

한강 시를 접고 황정은 소설을 읽었다.


한강은 예술가의 세계를 늘 면밀하고 공들여

그려가는 솜씨가 독보적 작가이다.

한 사람이 어떤 계기로 연민과 공감의

세계에 받을 딛게 됐는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더 고통스러워지는지,

그 고통이 결국 세계와 만나는 방식임을

치열하고 아름답게 그려간다.

먹먹하지만 찬란한 문장들이 곳곳에 가득.

한줄 한줄 치열히 써내려갔을 작가의

노고가, 역설적으로 서정으로 다가온다.

아픔이 아름다워지는 순간들이

그 세계 안에 있다.

이십 대 시절, 한강의 시와 소설에 이끌려

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열람실 자료관에서

이월된 계간지를 들척이며 한강의 초기작

서울 연작 시 페이지를 찾 읽었 날이 있다.

도서관 창가에 곧은 빛이 새어 들어와,

그 앞 복사기에 책을 펼쳐 한강 시를 카피했고

그 빛이 그 시와 같단 생각을 했다.

여전히 그 계간지가 모여 있던 칸이 떠오른다.

그땐 그 시들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엄밀히는 문학 동아리 후배들에게 주고 싶었다.

당시 현대문학연구 학회 짱을 맡고 있었고

함께 속한 이들에게 한강을 소개하고 싶었다.

그 시절 그 학회는 역마살 심한 때문에

 공부보다 놀러다니며 떠드는 데에

집중하긴 했지만

서로 좋아하는 작가들을 공유할 수 있는

행복한 자리이기도 했다.

에이포용지 몇 장을 든 채 밖으로 나왔던 어느 날,

그때의 풍경이 기억났다. 봄날이었다.


그 생각을 하던 전철 안,

바로 전날 밤에도 친구와 퇴근 후

옛 학교 도서관에 갔다.

친구는 커피를 마셨나. 나는 비타민을 마셨나.

어릴 적처럼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들고

우린

자정무렵 대학시절 중앙 도서관 앞에서

깔깔거리며

한참을 서서 예전 얘기들을 나누었다.

친구는 오랜만에 앞에서 담배를 태웠고

담배향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친구의 그날 기분과 작은 일탈을 존중했다.

중앙도서관과 <담배와 커피>는

한 세트 같기도 했다.

친구가 좋아하던 영화가 짐 자무시의

담배와 커피이기도 했다.


서점에서는 기억나지 않았는데

지금 휴대폰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니 문득

이유 있는 선택이었던가 싶다.

한 밤에 도서관 근처 그 길을 산책했던 것.


문이 굳게 닫힌, 도서관 앞에서

우리는 사람에게 어떤 것이 고갈되었을 때

살 수 없는지에 대한 얘기를 가볍지만

진실로 나누었고....

보안용으로 불이 켜진 서고를 올려다보면서,

저기 들어가고 싶단 생각을 함께 나눴다.

친구는 보통의 사람들조차

서사 없이 현상만으로 진술하는 인생은 견딜 수 없고,

자신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의 삶이

파멸로 향할 수 있다는

어떤 논문의 연구 결과를 알려줬는데,

며칠 전 읽은 어느 과학 대중서에서

밀폐된 공간에서 인공 불빛만 보고

자연광을 보지 않았을 때 생기는

인격 상실 변화와도 맞닿는 면이 있어,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보통의 삶이라도 이야기로 회상하여야

삶을 지속하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 

마치 인공 조명이 아닌 햇빛을 쏘여야 

살 수 있단 말로 들렸다.

그 빛이란 사람과 사건이

자신 안에서 재조립되는 어떤 에피소드의

기억들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사춘기인 어린 어른사람으로

성격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절제력 없던 우리가,

절제하고 있는 생활에 대해...

서로 격려 했고,

앞과 뒤가 다르지 않은,

보는 그대로였던

어떤 친구들에 대해 회상했으며,

인내심은 부족하나 그저 살아내야 하는

우리 같은 무리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그런 우리조차

사회생활은 늘 다른 자아로 포장해,

무색무취로 포즈를 취하는 것에 대해

각자의 고통을 토로했는데 ... 그런 인내 거쳐

누군가들 혹은 자신을 변화시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자고, 기꺼이 응원했다.

소소하게는 한글과 액셀의 단축키를 두루 익혀  마우스를 깨버리자는

업무적 얘기를 나누 웃고 말았는데,

그때 마침 우리 앞으로 고양이가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재빠르게 사라진 고양이를 보며

친구는 고양이는 늘 사진에 담을 수 없지.라고 말했다.



빛을 받은 고양이가 어느새 숨어버린 그 길에서

문득 빛의 전시를 보고 싶어졌고

조만간 북서울미술관 근처를 산책하며

빛 전시를 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

우리가 갈망하는 이야기들에 대해

좀 더 집중해보자는 갈망으로,

다음 날도 2호선과 5호선을 번갈아 타며

한때의 출퇴근길였던 경로를

그 시절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걷고 타고 걸었다.


친구와 고양이와 도서관 빛, 그 풍경을 한데 떠올리면

성시경 <다정하게, 안녕히>

가사도 겹쳐진다.


"시간은 고여 있고 니 어깨 위에 달빛 그렇게 멈춘 우리 둘"


다정하게 안녕히, 구르미 그린 달빛 뮤직비디오

https://youtu.be/cZ7sOWhnF3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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