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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zzy Aug 04. 2022

스물다섯, 스물하나

그날의 영도는 퍽 따뜻했었지


몇 주째 마음이 부산에 머물러 있다. 이틀보다는 짧고 하루보다는 긴 것 같은 16시간 부산여행을 다녀왔다. 계획에 없었고 불쑥 친구를 만나기 위해 갔다. 충동적으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기도 해서 그날이 무척 행복했던 모양이다.


일상에 돌아오니 하루하루가 그날에 퍽 못 미친다. 그래서 더 그날에 정신은 머물러있다.

당연하다. 여행 같은 나날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좋아하는 일을 하면 조금은 더 참을 수 있지만, 좋아하는 일 역시 계속되면 슬럼프는 오기 마련인데, 게다가 그다지 끌리지 않는 일이라면 일상은 고통스러운 게 당연하다.

오늘 힘들지? 내일은 아마 더 힘들 걸.

스스로에게 말했다.

어쩌면 좀 포기하듯 고통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단 생각 든다. 그리고 그저 지난 여행과 다음 여행으로

다소 번잡한 일상을 용인하는 것. 그 사이로

일상을 견디는 것. 내겐 그게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난 여행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하고 그때 좋았던 거리나 풍경들을 생각하면서 일상을 버틴다.

가장 싫은 사람과 일을 하고 가장 좋은 사람과 여행을 하고...

극단적인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이번 여름은 흘러갔다.

드라마 그해 여름은, 스물다섯스물하나, 나의 해방일지를

연달아 보았고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엔

어린 마음이 남아 있어 쉽사리 반하고 또 쉽게

상처받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주기가

예전만큼 짧지는 않다는 사실. 꽤 오랜만에

인간적으로 사람을 믿게 되었고

그 기분은 활력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뜨거운 여름이 주는 축복일 수도 있다.

유난히 계절에 민감한 이에게는 더더욱!


이번 여행에선 우연히 새로운 장소를 방문했다.

기장이나 해운대나 광안리를 가고 싶었지만

친구가 피곤해 보였고 내키지 않은 기색이었다.

이동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영도를 말했더니 흔쾌히 가보자는 포즈를 지었다.

내 MBTI가 (스스로 그다지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ENFP이다. 지금껏 즉흥적인 결정을 자주 내렸고

그 결과에 대해 딱히 후회해본 적이 없다. 만일이라도 아쉬우면 곧장 더 아쉽지 않을 만한 방도를 찾았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남과 함께든 홀로든 특별한 감정을 느끼길 바라고, 타인이 여행지에 같이 있다면 나로 인해 더 좋은 세상을 경험하길 바란다. 여행지는 계속 변한다. 어디든 상관없다.


그렇게 가게 된 영도였다. 유퀴즈가 지금처럼 섭외 인터뷰 포맷이 아니라, 지역을 돌며 일반인들을 만나러 다닐 당시, 영도가 촬영지였던 적이 있다. 그때 가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유재석, 조세호가 거기서 자라고 일하며 나이 든 할머니들의 에피소드 경청날 날였다. 뭉클했다. 어디든 떠도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한자리에서 묵묵하게 어떤 고생을 감내하고 참고 살아온 어르신들의 얘기를 보면 저절로 숭고해진다. 부모님이 감내해 오셨을 과거처럼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날도 영도에 가는 길에 친구에게 부모님에 대해 물어보자, (특정하게는 엄마!) 어른이 되어버린 친구는 연민이 느껴지는 대상이라고 했다. 자식을 키우며 많은 것을 인내해 오셨을 모습에서 본인의 모습을 새로이 투영하는  같았다.

https://youtu.be/z0VdkJfeNLA

청춘이 다 흘러버린 자리에 자식이 있을 때 그 존재가 자신을 채워줄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부모의 외로움을 아는 나이가 되면서, 자식이 백 프로 부모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부모는 백 프로 이상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니 부모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갖는 순간, 사람은 완전히 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부모님들 얘기를 하며 보수동 책방 골목과 깡통시장 등을 거쳐  재래시장을 지나갔다. 깡통시장 근처에는 옷집이 많은데 옛날에는 그곳이 당대 패션피플, 패피들에게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양장점에서 옷을 자주 지어 입으셨다는 엄마가 말씀해주신 곳였다. 긴 시장 길을 걷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얘기는 황정민이  주인공였던 '국제시장'으로 흘러갔다.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한 채 옛날 영화가 되어버렸는데 친구는 그 시절에 이미 보았다고 했다. 둘이 감독 이름을 떠올리다 스무 고개 하듯 흘렀다. 색즉시공 만든 감독인데 이름이... 내가 윤제문! 이라고 말한 바람에,

그 사람은 배우! 그 배우 인상 진짜 세지, 그러면서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감독 이름은 윤제균. 검색해 보니 우리가 부산을 여행하고 있던 시기에 CJ 콘텐츠 기업 신임 대표로 선임됐다는 보도자료 온라인에 가득했다. 그렇게 국제시장을 지나 이탈리안 음식점을 검색해 찾아갔다. 코로나 여파를 심하게 받은 탓일까. 지도상에는 인기 맛집이라고 했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더한 건 주인과 알바생의 '의욕 없음'이었다. 왠지 우리가 나가길 바라는 게 아닐까 싶은, 왠지 측은하면서도 무력한 분위기를 풀플 풍겼다. 만화 속 주인공들 같기도 했다. 파스타를 시켰더니 오늘은 재료가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또 다른 걸 택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주말에 재료를 갖추지 않은 집이라니! 이 무슨 사연이 있는 레스토랑일까? 궁금해졌다.

일부러 손님을 배제하는 듯한 식당에서 우리는 다음에 오겠다고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몇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친구와 갔다가 친구가 역시 맛집이라 데려간 레스토랑이 갑자기 떠올랐다. 조인성 얼굴 입간판이 보이는 자리였던 게 기억났다. 조인성 사진을 찾아 걸었다. 부산타워, 영도공원을 내려와서 밥을 먹은 게 생각나, 타워 올라가는 길목을 향해 걸었다.

아! 여기다. 조인성이 있던 자리.

파크랜드 모델이 조인성에서 이승기로 바뀌어 있었다.

그 앞 레스토랑에 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영업을 중지한 것인지 휴가인지 알 수 없었다. 몇 걸음 더 걸어 바로 옆에 있는 이탈리아 음식점에 갔다.

값이 다른 데에 비해 저렴했고, 그래서인지 손님은 많았다. 유명 프랜차이 브랜드였다. 모히토와 스파게티, 샐러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역시 그 계열답게 내겐 좀 짜고 입맛에 맛진 않았으나, 친구와 같이 먹어서 맛있었다. 샐러드를 다 먹자 배가 불렀다. 양으로 승부하는 집이었다. 남기기 싫어 스파게티도 꾸역꾸역 먹었다. 배가 너무 불렀다. 모처럼 과식이었다. 감정도 그랬으니 하루는 그냥 넘어가자. 배부른 상태를 요사이 기피하고 있었으나 그만큼은 부산이었고 꿈을 꾸는 듯했고 뭘 해도 좋았다. 이런 날 하루쯤은 있어야지, 자족했고 부풀었다.

밥을 먹고 배부르고 졸린 상태로 영도에 갔다. 날이 무척 더웠고 그곳은 요새 '핫한' 지역이었다. 20대 추정 커플들이 길목에 가득했다. 세대 관계없이 남녀노소 많았지만 특히 (비혼) 커플로 추정되는 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는 건 그만큼 찾아서 오는 필수 데이트 코스가 아닐까. 기대도 없이 왔지만 스무살 느낌을 환기시켰다. 낯선 풍경, 처음 방문한 동네, 그리고 경계없이 저멀리 펼쳐진 푸른 바다뷰, 그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아름다울 곳이었다.

그런데 웬일. 낮에 먹은 스파게티, 샐러드로 탈이 나서 속이 미식거리고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급체 증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결국 토했다. 역시 급체에는 토하는 게 상책이다. 노랗던 하늘이 다시 푸르게 변했다. 영도를 떠올리면 금세라도 오르막길에서 어질어질해 쓰러질 느낌과 다시 제정신을 차려서 온화해졌던 극단의 느낌이 기억날 것 같았다. 친구의 여행 기분을 망치기 싫어서,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날 부산역에서 헤어지는 길에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나를, 친구가 자연스찍었다. 그리고 보내주면서 말했다. 진짜 피곤해 보이는데...

맞다. 나는 그날 졸도 직전이었다. 그런데 영도 바다는 무덥기보단 따스했고 또 시원해 보였다.

눈은 결국 주관적으로 변한다는 걸, 새로운 여행지에서 떠올렸다. 카페 2층에서 저멀리 부산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먼 바다의 배들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고 먼 섬과 도시의 산까지 두루 보였다. 운동하는 사람과 데이트 하는 사람 등 많은 이들이 길을 오갔다. 흰여울 문화마을. 입간판이 보였고 이곳이 부산 필수 방문지이자 출사 지역임을, 여행지에서 돌아오고서야 알았다.

다시 가고 싶었다. 또다시 간대도 그날의 기분은 그대로 느낄 수 없겠지만 나는 그날 부산에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 고단한 일상, 맘 둘 곳 없는 조직 생활, 무언가 더 이루고 경험하고 싶은 어린 맘, 그리고 조바심, 불안... 수많은 번뇌를 그 바다가, 그리고 친구가 받아주었다.

카페에 앉아 시집 한 권을 다 읽었고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사이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간간이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그날의 바다는 참 다정했었지."

카페에서 드라마로 다시 유행가가 된 자우림의 곡 스물다섯스물하나가 나왔다. 그 곡이 발매된 당시에도 나는 부산 출장 겸 여행 중이었고 비즈니스호텔 방 안에서 그 무대를 티브이에서 보았다. 그때보다 훌쩍 시간이 건너 뛰었는데도 여전히 노래는 나를 그때로 데려갔고 또 그때의 친구가 옆에 있었다. 소중한 사람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형이길 바라는 맘으로  가사를 경청했다. 

"가슴 시리도록 행복한 꿈을 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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