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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프레스 Sep 25. 2024

이현도, 친구에게

90년대 그 시절 사랑했던 가요 3

듀스 라이브 앨범에서 제일 많이 들은 곡은 ‘친구에게’라는 노래야. 듀스 해체 후 김성재, 이현도가 각자의 앨범을 낼 때 이현도가 1집 “두잇(Do it)”에 수록한 곡인데, 서글픈 멜로디 때문일까. 친구가 그리울 적마다 듣곤 해. 이현도와 김성재가 헤어진 이유가 한쪽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란 걸 알기 때문에 더 슬픈 곡이야. 나도 팬이긴 했지만, 당시 나랑 같이 앉았던 짝꿍이 더 강도가 센 팬이어서 그 뉴스가 나올 때 친구가 정말 펑펑 울었어. 패션을 좋아하던 친구였는데(당시 김성재는 패션에 소질이 있던 이들에겐 히어로였거든) 그때 내 옆자리에서 울고 있던 친구의 충격 받은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나. 팬들이 그 정도였는데 친구인 이현도는 정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헤아릴 수도 없을 거야.  


지금 곁에 언제나 이유도 없이 기댈 만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친구와의 우정이 자연스레 지켜지고 있다면, 그걸로도 인생은 충분히 잘 살았고 잘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친구란 연인과도 다르고 가족과도 다르잖아. 조건 없이 믿어주는 사람인 거니깐. 날 응원해 주는 한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은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물론 친구나 우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사는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야.

날 거울처럼 바라봐 주는 이, 어떤 상황에서라도 나를 신뢰하고 함께 걸어가 줄 동반자, 그런 친구가 있다면 뭔가 다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조차도 힘을 얻게 되잖아. 100명의 사람이 나를 버려도 그 한 명이 나를 믿어준다면, 그 신뢰로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니깐.  

90년대 어릴 적 난 친구를 되게 좋아하는 성격이었어. 그래서인지 학창시절엔 이름보다 반장이라는 호칭이 더 많이 익숙했어. 반장만 한 애들의 특징이 있는데, 좀 그런 성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인 거지. 모두가 불편하지 않고 편안한 상태를 만들려고 은연중 애쓰는 거. 누구 하나 주변에서 소외되지 않았으면 하는 거. 왠지 어느 편에서 조용하게 외로워 보이는 사람에게 눈길이 더 가는 거.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괜히 더 좋아하고, 그게 반장‘병’이 아닐까 싶어. 학교 다닐 때 나는 반장이라서 친구들을 챙기는 게 즐거웠어. 대놓고 챙길 수 있으니까. 오지랖을 떨어도 이상하지 않잖아. 그런 게 의무인 사람들이기도 하고. 중학교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는데, 그때는 심지어 연임을 해서 3년 6학기 내내 친구들이 반장으로 뽑아주니까 그냥 계속 했거든. 친구들과 체육 대회 준비하고 합창 대회 준비하고, 시험 때는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도 뽑아서 알려주고, 이래저래 친구들 생활을 참견하면서 우리반이 행복하길 바라며 사는 거야. 그게 즐거웠어.

고등학교 생활을 할 때도 친구들이 반장으로 뽑아줬는데, 사춘기가 늦게 와서 그걸 고사하고 투표를 다시 진행하자고 말하고 사퇴했는데. 어릴 적 후회하는 일화 중 하나야. 난 반장 안 할 거라서 다시 투표해 달라고 교무실에 가서 담임에게 말하던 순간과 교실에서 말했던 게 내겐 묘한 상처로 남아 있어. 그때 그냥 용기있게 반장을 했더라면, 그래도 친구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내가 학창 시절을 좀 즐겁게 보내지 않았을까 후회돼. 특목고를 다녔던 터라, 학교생활에 좀처럼 적응 못하고, 많이 염세적이고 어두웠어. 말도 거의 안 하고 조용히 좀비처럼 지냈어. 도무지 인생 의미를 찾지 못했고, 홀로 내 세계 안에만 고립돼 있고 책만 읽었는데, 지나보니 물론 그것도 나름 다 이유가 있었지만, 많이 외로웠던 거 같아. 물론 친한 친구는 몇 있었지만, 한두 명과 지내기보단 두루두루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했던 나는 급격히 다른 환경과 태도로 외골수로 살았는데, 그때 성격이 스스로 폐쇄적이 되었다고 느끼곤 해. 그걸 극복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거든. 대학을 다니고 밴드를 하면서 그 친구들에게서 고등학교 시절 상처를 보듬게 됐고, 다시 또 사회생활 하며 조직에서 받은 상처는, 그걸 예술하는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또 작가들에게서 받은 상처는 어떤 한 친구에게서 씻긴 했어. 이렇게 사람은 어느 시기의 친구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자신의 과거를 수용하고 상처를 씻고 매듭짓고 다음 단계의 인생으로 건너가는 게 아닐까? 주변 인간 관계로 힘들 때 나는 자주 이현도의 ‘친구에게’를 찾아 듣곤 했어.  


“지금 이때만이 아니고, 항상 생각하는 마음을 지금 같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친구에게’ 부르겠습니다.”

듀스 포에버 라이브 앨범에 실린 친구 곡을 부르기 전 이현도 내레이션이야. 억양도 90년대 말투라 잔잔해서 위로가 돼. “슬픔은 쉽게 잊고 사랑은 지키기 어려운 혼자 남은 세상이 나는 너무나 슬프구나”라고 친구에게 말하는 가사를 특히 좋아해.  

“아주 가끔은 내가 너무 힘들 때 예전처럼 니가 날 위로해 주렴”이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로 위로가 되는 말이야.

노래를 듣다 울컥해서 운 적도 많아. 한때 위로가 되던 친구가 어떤 이유로든 내 곁에 없을 때라든가, 지금 당장 연락할 수 없는 처지일 때 대신 이 노래를 들었거든. 90년대에도 들었고, 2000년대에도 들었고, 2010년대에도 들었고, 2020년대에도 듣고 있네. 3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마음속엔 무작정 위로받고 싶은 ‘어린 마음’ 하나가 숨어 있고, 그걸 이 노래가 계속 건드려서 혼자가 아니라 말해주는 거 같거든.

단짝이라는 존재, 소울메이트, 나이가 들어가도 여전히 갈구하는 대상 같아. 그건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횟수라든가 통화하는 빈도수 이런 계량적 수치와는 무관해. 얼마나 서로를 알아주었느냐, 이해했느냐의 마음의 농도가 중요하달까. 네가 없을 때 내가 얼마나 인생의 허무를 느꼈는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어느 시기는 공백이어도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시간의 강한 이끌림, 감정의 점유율, 그런 게 좀 더 커. 이제는 친구를 어릴 적 반장병에 걸렸던 때마냥 두루 사귀지도 못하고, 혼자 있는 걸 더 익숙해하는 성격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소울메이트에 대한 이끌림이나 그런 그리움, 가끔의 진한 우정에 대해 깊이 떠올릴 때면, 이현도의 ‘친구에게’를 듣곤 해. 오늘 밤에도 들어야지.  


https://www.youtube.com/watch?v=RiSaNQKF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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