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화 증후군이라는 알람
불편한 게 많다. 생물학에선 생물이 환경에 맞춰 몸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적응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인간으로서 최소한 나는 생물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다. 왜냐하면 사람은 불편을 느끼면 불평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상황을 전복시키기도 하고.
프로불편러가 돼가는 느낌이다. 내 몸의 불편에 시시때때로 반응하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타인보다 민감한 만큼이나 내게 맞지 않는 것들을 비판 없이 수용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편해지는 게 옳은지 현재의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의 옳음을 나의 불편함이 말해준다고 말할 수는 있을 듯하다. 의견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기 이전에, 그것이 객관성이나 공공성을 얻기 이전에, 선험적으로 묻어 나오는 나의 반응은 나에게 옳은 해석일 수밖에 없다.
신체화 증후군이 나에게 가져다준 이점은 이런 것이다. 두루뭉술하긴 하지만 내가 어떤 불편을 느끼고 있다고 일러준다. 그러니 주의하라고, 생각해보고 무엇이 너를 지금 괴롭히는지, 무엇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지, 너를 흔들어 깨우는 너 자신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아무튼 나는 오늘 그러했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청년들을 아이 취급하며 괜찮은 '자식'이라고 판단하는 모습이 불편했다. 왜 청년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의 눈에 보기 좋아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성년들의 모임에서 특정한 사람만이 상대를 평가하는 발언을 입 밖으로 쉽게 낼 수 있다는 현실이 매우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