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햇살처럼 몰려다니던 하얀 벚꽃이 검은 아스팔트 바닥에서도 자취를 감춘 날, 다음 막이 열리듯 풍경의 색은 바뀌었다. 이른 장마처럼 쉼 없이 퍼부어대는 소리에, 아직 무성한 것이 없는 나무들은 조용히 변화를 맞을 뿐이었다. 오랜만의 긴 낮잠을 방해하며 밤새 바닥을 울릴 소리들과 함께 하루의 어둠이 여느 때처럼 물러나면 언제 그곳에 하얀 것이 있었는가, 하며 푸른 그림자가 울창해질 예정이었다.
푸르기에 풀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푸르다의 명사형, 뭐 그런 것인가 생각해왔다. 몇 세기 전부터 한반도에 살던 이들은 하늘빛을 닮은 푸르름과 땅이 내는 잎의 푸르름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대인들의 마음속 여름 풍경만큼이나 분명 비현실적인 싱그러움이었을지 모르겠다. 가깝고 먼 섬들 너머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습기와 바람이 들이닥치기 전에도 반도의 거주자들에게는 하늘과 땅이 합쳐져 보이는 여름이었나 보다.
봄이 떠날 채비를 하니 아쉬운 점이 남았다. 더워진 날에는 오래 걸을 수가 없다. 근육통이 잦은 나의 몸을 달래려고 걷기 시작한 지가 벌써 반 달째였다. 동기도 분명했고 보상과 보람도 만족스러운 차였으나, 비바람이 일상이 될 날들의 시작은 이전의 결심을 충분히 움츠러들게 할 것이다. 하루아침에 을씨년스러움을 감춘 더운 계절을 맞이하면서, 결국 오늘 오랜 낮잠에 들어야만 했다.
이제 따뜻한 것은 국물보다 볶은 음식들로 자주 먹게 될 예정이다. 그리고 볶음밥에는 어느 것이나 들어가는데, 기름과 소금기에 볶이고 절여진 브로콜리를 씹으면서 이것은 무엇인가, 생각하였다. 맛은 없고 영양가는 많은 푸르른 것이다. 여름의 더움과 같은, 그렇지, 푸르기에 풀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보다, 하며 이른 여름을 맞이하는 주문을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