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스페인 즐기기
지난 토요일 망원동 한복판에서 스페인을 맛 봤다.
망원동에 있는 쌀 가게 - 동네 정미소에서 '서령'이라는 요리사가 빠에야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동네 정미소는 원래 단정하고 깔끔한 맛의 한식을 파는 곳인데 이 날만 특별히 팝업식당으로 예약을 받아 운영됐다.
솔직히 빠에야, 그거 뭐 대충 해물이랑 밥이랑 볶은 거 아닌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2년 전 여름, 스페인에서 한달 정도 있었는데, 아는 요리라고는 타파스랑 빠에야 밖에 없어서 주야장천 빠에야 맛집만 찾아다녔더랬다. 근데 현지에서 먹어보니 더욱 그랬다. 샤프란을 넣은 특별함 따위를 알아챌 정도로 나의 미각이 뛰어나지 못해서이겠지만, 이런 빠에야 저런 빠에야 다 먹어본 결과, 빠에야는 그냥 물기 좀 촉촉한 해물볶음밥 같았다. 실제로 스페인 안달루시아 네르하에서 2주간 B&B로 머무렀던 집 호스트도 그랬다. 빠에야는 스페인 사람들이 일요일 아침에 냉장고 파먹듯 해먹는 '집밥'이라고. 빠에야의 유래를 찾아봐도, 우리로 치면 농번기, 시골에서 다같이 비벼먹던 양푼 비빔밥 같은 느낌이었다. 집시들의 돌솥 비빔밥. 그래서 이 날도 그냥 그때의 여행 추억이 그립고, 개인적으로 '서령'이란 요리사를 좋아해서 간 것이지, 빠에야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다. 근데, 역시 다녀오길 잘 했다. 스페인 현지 아주머니가 해준 맛보다, 유명 레스토랑에서 먹은 맛보다 좋았다. 뛰어난 요리사가 정성껏 차려낸 훌륭한 맛이었고, 곁들여진 설명도 크게 한 몫 했다.
이 날 빠에야는 '신동진'이라는 이름(품종명)을 가진 쌀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서령의 말에 따르면 빠에야는 쌀알의 몸매가 통통하고(짧고 굵은) 단단한 것이 좋단다.
그래야 쌀이 육수를 양껏 흡수해서 씹을 수록 맛이 좋고 전체적으로 요리가 질척이지 않기 때문.
스페인에서는 빠에야의 고장, 발렌시아에서 주로 나는 '아로스 봄바’ 라는 품종을 쓰는데, 우리나라 신동진 쌀도 비슷한 맛과 질감이 난다고 한다. 멀리서 외국산 들여오려면 분명 약품처리, 최소 산화되어서 맛과 영양이 상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밥은 현지에서, 제철에 나는 식재료로 해먹는 게 몸에도 좋고, 지구에도 좋을 거 같다. 심지어 맛도 비슷하다니 땡큐~
신동진 쌀 외에도 우리 쌀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쌀은 대부분 일본에서 들어온 품종(고시히카리, 아끼바레(추청) 등)인데, 밥맛을 좌우하는 쌀의 소중함을 아는 일본은 쌀 이름 하나도 공들여 짓는 반면, 우리는 박정희 정부 시절 만들어진 '저곡가' 정책 때문에 다양한 토종 쌀이 재배되지 못하는 형편이란다. 토종쌀은 익었을 때 검은색, 붉은 색이 도는 품종도 많아서, 원래 우리나라의 가을 논두렁은 황금색이 아니었다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이 날 팝업 테이블에는 빠에야 외에도 다양한 스페인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가스파쵸 : 스페인에서 여름에 즐겨 먹는다는 시원한 토마토 냉스프
-스페니쉬 오믈렛 : 감자와 양파를 튀긴 후 달걀을 부어서 두툼하게 구워낸 오믈렛
-채소구이와 로메스코 살사 : 당조고추, 대파, 미니당근, 홍감자 (로메스코 살사는, 파프리카로 만든 우리나라 쌈장 같은 거란다.)
-작은 타파스로 나온 파슬리 살사 양송이버섯구이
-복숭아와 비트 절임이 들어간 샐러드 (드레싱도 스페인 술 '쉐리주'를 이용한 쉐리비니거)
-순백의 마늘 마요네즈 (이게 또 완전 마성의 소스였음), 양배추 레몬소금절임 등등
다양한 스페인 요리를 화사한 부추 꽃과 함께 먹으니 눈과 입이 즐거웠다. 조미료를 쓰지 않고 제철 재료로 차린 밥상이니 분명 몸에도 좋았을 것. 실제로 먹고 나니, 다음 약속 장소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싶어졌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고 몸에 에너지가 돌았다.
점심 한끼로 열정의 나라, 스페인에 다녀온 듯,
¡Fantástico! (판따스띠꼬 : 최고!)
맛이 있는 주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