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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 Oct 19. 2019

나는 유명인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녹음기 하나, 마이크 하나를 들고 전국을 누빈 내게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건네는 공통적인 말이 있었다.


"아유, 열심히 하셔서 TV에도 나오시고 유명한 아나운서 되셔야죠."


나와 처음 만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인들도 그런 말을 내게 종종 했다. 아나운서와 리포터의 역할은 완전히 다를뿐더러 악의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내가 자꾸 곱씹게 되는 것은 "유명한"이라는 단어였다.

그러나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유명해지고 싶지 않고,
내가 유명인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방송을 하는 사람 중에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큰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말과 글을 마음껏 사용하고 싶어서 방송인이 되고 싶었으니까.

지방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해서 공중파 라디오 공채 리포터로 자리를 옮겼을 때 나는 처음으로 공중파의 위력을 실감했다. 전국에 있는 내 친구들이 내 목소리를 잘 듣고 있다며 연락을 하기도 했고, 부모님 친구들이 지금 나오는 사람이 딸이 아니냐며 연락을 해오셨다는 것이다. 취재를 나가면 종종 OO프로그램 하시는 분 맞죠? 혹은 57분 교통정보 하시는 분 맞죠? 하며 물어오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부모님의 자랑이 된 것 같아 기뻤고, 내가 하는 방송을 듣는 분이 정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울 때도 있었다.
전화 연결을 통해 특정 장소에 가서 라디오 생방송을 하는 코너가 있었다. 나 혼자 현장에 가서 전화로만 연결을 하는 코너였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는 젊은 여자가 열심히 전화통화를 하는 모습일 텐데,, 방송이 끝나자마자 어떤 남자분이 내 뒤로 와서 "하지나 리포터님...?" 하며 나를 불렀던 것이다. 근처를 지나시는 길에 일부러 들러 나를 찾으셨다고 했다. 다행히 좋은 분이었지만 다리가 풀릴 정도로 놀랐던 그날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얼굴이 노출될 일이 없는 나도 이런데 연예인들은 오죽할까? 이런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던 계기였다.


이름만 말해도 알만한 분이자 커리어로도 엄청난 분과 가끔씩 식사를 할 일이 있었다. 처음 식사를 하던 날, 식당까지 같이 걸어가면서 나조차도 '내가 이분과 식사를 하다니!!'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XXX다!!!"

식당 안에서나 밖에서나 웅성대는 소리에 신경 쓰이실 법도 한데 그분은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소탈한 모습으로 대하셨다.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유명인의 삶이란 이런 건가?라는 생각을 정말 깊게 해 보게 됐다.

나를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때로 아주 큰 공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세상에는 나이스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는 방송하면서 처음으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악성 문자를 받아봤다.

친밀한 매체이다 보니 진행자에게 감정이입을 깊게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 정도가 과했던 사람이었다. 개인정보가 담긴 자신의 면허증 사진을 전송하는가 하면 자신의 사생활, 연애사를 가감 없이 보내오던 사람이었다. 정도가 더 심해지면서 문자에 일절 대응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욕이 날아들었다.


이래서 앉아서 일하는 X들은 XX를 찢어버려야 돼.
네가 뭐 그렇게 잘났는데 내 문자를 씹어?
고소해라 XXㄴ아. 블라블라


1인 방송 시스템이다 보니 내가 모든 문자를 보고 선별해서 방송을 해야 하는데,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손부터 떨려왔다.
심장이 뛰어서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원색적으로 나를 비난하는 말을 처음 들었다.
머리가 띵해졌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속상하다고 울 수도 없었다. 방송을 해야 하니까.
몇 주간 그런 문자가 이어졌고 문자를 보낼 수 없게 차단을 했더니 온 방송국 게시판에 내가 대놓고 무시한다고 글을 올리고 다녔다.

담당 팀장님께 보고하기도 했지만 큰 조치를 바라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상대가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이 작정하면 내가 이상한 ㄴ 취급을 당할까 봐 미리 손을 쓴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무 충격이 컸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라도 하지 않으면 털어낼 수 없을 것 같아 몇몇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다.

"신경 쓰지 마. 그런 '미친 또라이'들은 어디에나 있어..."
친구들은 진심을 담아 무시하라고 얘기해주었다.

맞다. 알고 있다. 그 사람이 '미친 또라이'라는 것.
하지만 그 '미친 또라이'는 정확히 나를 향해 칼을 찔렀다.
진심을 담아 말해준 친구들의 이야기도 사실 그때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동안 헤어 나오기 힘들었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

그 이후에 나는 철저히 내 편을 들었다.
욕하고 싶으면 욕했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라고 했다.
한번 더 열 받게 하면 DJ 당장 그만두고 목 따러 가면 되니까 기죽지 말고 일단 이번 주 방송 잘해보자고 달래서 한 주 한 주를 버텼고, 어느샌가 회복돼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의 특정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언제든 조치를 취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람의 정보가 노출된 상태였고, 1명이었기 때문에.

또한 내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생활이 대중에게 공개될 일도 없고 그를 통해 욕을 먹을 일도 없었다. 미친 또라이에게 당하는 상황이 정말 마음에 안 들면 일을 그만두면 될 일이었다. 나는 지금 당장 그만둔다고 해도 왜 은퇴하는지, 은퇴 후에 어떻게 사는지 온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히지 않아도 되니까. 잊힐 권리를 주장하지 않아도 잊힐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노출되는 상황에서
불특정 다수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냥 손가락질로도 모자라 욕설을 하고 절벽으로 밀어낸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평범한 삶을 위해 은퇴를 선택하더라도 최근 근황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될 수 있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평범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이 시들어가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방송인들은, 연예인들은 웃어야 한다. 그게 우리 일이니까.

상대가 유명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면전에 욕하고 모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다 인기야. 그 덕분에 돈 벌잖아?'라는 생각과 말로 유명인들에게 쉽게 상처를 준다.

사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해도 오늘 한 연예인의 사진을 보고 '어머.. 성형인가.. 얼굴이 너무 달라졌네..'하고 생각했음을 깨닫는다.

우리 사회가 누군가를 평가하고, 쉽게 이야기하고, 비난하고, 욕하는 것에 너무 무감각해지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정신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으면 한다.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관찰과 치료가 필요하고 욕설을 당한 사람도 세심한 케어와 치료가 필요하다.

적어도 말 때문에 사람을 잃는 일이
더 이상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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