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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예라 May 23. 2024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비춰줄 거울 하나

버려진 거울 하나와 간직할 거울 하나에 관한 이야기


나는 웬만해선 인위적으로 손절을 하지는 않는 편이다. 만약 그가 인연이 아니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관계가 끊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굳이 마음고생해 가면서 내가 먼저 전화나 카카오톡 친구에서 '차단'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손절을 일삼는 듯한 친구를 보면 '아니 힘들게 꼭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적어도 A를 만나기 전까지는.


 A는 나를 만나면 일단 자신의 가족, 직장 상사, 후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끝없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듣다 보면, 나도 언젠가 A의 입에 껌처럼, 과자처럼 씹힐 날이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당장은 아닌데 돌아서면 이상하게 기분이 나쁜 말을 매우 자연스럽게 했다. 어느 날, 내가 진한 핑크색 스커트를 입고 모임에 나간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말했다.


"니가 그동안 입었던 옷 중 그게 제일 낫네."


얼핏 들으면 내가 입은 옷이 예쁘다는 칭찬 같았다. 그런데 집에 가다 생각해 보면 '그럼 지금까지 내가 입었던 옷은 다 이상했단 말인가?'라는 불편한 의문을 남기게 했다.


한 번은 내가 '탈북청소년'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논문을 한번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A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물었다.


 "지금 정권에서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건 알지? 힘들게 써봐야 아무도 안 읽을듯한데. 그렇지?.."


몇 날 며칠 고민하고 겨우 생각해 낸 연구, 아직 시작도 안 한 새싹 연구자의 논문을  '써봐야 안 읽을 것 같은' 논문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사실, 난  연구 대상이나 주제를 정권의 선호도에 맞추어 선택할 마음이 없었다. 정부에 연구비를 지원받을 일도 없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냥 내가 궁금한 사람들에 대해 연구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보며, 좀 더 다양한 문화와 세계관을 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어느 날은, 막내를 키우느라 잠시 일을 하지 않고 있던 나에게 기어이 이렇게 말했다.


"어머. 말로만 듣던 경력단절녀가 돼버렸네. 맞잖아. 난 원래 틀린 말은 안 해."


모임에서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망설임 없이 A의 연락처를 찾아 '차단' 버튼을 눌렀다. 평소에도 '나는 원래 솔직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솔직함을 빌미 삼아 언어로 된 칼을 마구 휘두르던 A를 더 이상 내 주변에 두고 싶지 않았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A와의 손절은 힘들었던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A에게는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을 잃을, 일방적이고 단호한 벌일지도 모르겠다.


대신,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 스타일을 하든, 무슨 주제에 관심이 있든 상관없이 일단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 주고, 격려해 주는 B에게 전화를 걸었다.


B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5년의 어느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자그마한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B는 나에게 '어린 나이에 정말 대단하다'면서, 꼬박꼬박 '원장님'이라고 불러주었다. 선생님을 고용하지도 못하고, 혼자서 운영과 강의를 다 하던 때여서, '원장님' 소리가 가당치도 않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다. 어느 날은, 예쁜 화분을 학원으로 보내주었다. 교재 출판사와 갈등이 생겨서 힘들어할 때에도, '결국 이 어려움을 이겨낼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들 육아 때문에 도저히 풀타임 직업을 가질 수 없어서 힘들어할 때,  B가 말했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천천히 생각해 보고, 돈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벌 수 있을 테니 너무 그렇게 조급해하지 말아."


오랫동안 나에 대해 빠삭히 알고 있던 B의 진심 어린 응원에 눈물이 날뻔했다.


고심 끝에 '에세이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당장 예쁜 청축식 키보드를 주문해 주었다. 타이핑을 할 때마다 '탁탁 타닥'하며 그 옛날 타자기를 치는 듯한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난 B가 선물해 준 키보드로 한 글자씩 쓰며 '이미 작가가 된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B는 덧붙여 말했다. 혹시 책이 나오거든 자신에게 지체 없이 알려달라고. 100권 산다고....


함께 있으면 어딘지 초라해지고, 별로 안 예뻐지고, 자신감이 없어지는 거울인 A를 내 삶에서 가만히 지워냈다. '내가 얼마나 너 때문에 속상했는지, 나에게 당장 사과하라.'면서 따질 최소한의 노력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치워버리고,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는 이십 대 초반, 오직 가진 것은 '대학 졸업장'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 밖에 없던 나를 알아봐 주었던 예쁜 거울인 B와의 오랜 인연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B와 대화를 하다 보면 어쩐지 내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B는 오늘도 퇴근을 하면 곧바로 우리 집으로 온다. 내가 정성껏 차린 저녁식사에 대한 감탄을 잊지 않고 반찬을 남김없이 먹는다. 그리고 아이와 공놀이를 하며 놀아주고, 씻겨서 재운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비춰주는 고마운 거울 하나, 바로 남편이다.

나는 B에게 어떤 거울일까?

이따 한번 물어봐야지.


사진: UnsplashGiorgio Tro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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