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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예라 May 24. 2024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우리 할머니의 긍정법  

새벽녘,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스름한 그때, 할머니를 따라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나는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세상살이가 어려울 것이 없던 여섯 살의 꼬마는 할머니의 눈물이 어린 기도를 이해할리 없으며, 그저 듣기 좋은 자장가 소리로만 여겼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자주 부르셨던 찬송가의 가사는 아직도 내 마음속 언저리에 남아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축복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1930년생이신 나의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가난, 다정하지 않은 남편, 멀쩡하게 대학 공부까지 다 시켜놓았더니  갑자기 개척교회 목사가 되겠다는 큰아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풍파를 그 작은 체구로 겪으셨던 것 같다. 아마도 할머니는 거칠고 모진 세상 한가운데에서도, 낙심보다는  감사하는 지혜를 터득하셨던 것이 아닐지. 그래서 결국은 인생에 주어진 모든 사명을 훌륭히 마치시고, 지금은 천국에서 안식하고 계신 것이리라.


나 역시 세상 풍파가 나를 흔들 때, 절망보다는 감사를 선택했다. 물론 나의 할머니가 겪으신 풍파에 비할 바 안 되는 보편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기에, '나 고생했어요, '라는 말이 어쩐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듯 민망하다. 그러나 모든 인생이 그러하듯, 저마다 굽이굽이 사연이 있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고, 어이없는 불행이 있었다. 주로 가족의 안위와 관련되는 일기에 어디로 피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어려움들이 하나가 가면, 새로운 또 하나가 오는 식으로 나를 찾아오곤 했다. 그때마다 나도 나지막이 할머니가 부르시던 찬송가 가사를 되뇌었다. 


삶이 나에게 무심코 던져주는 고난은 때로는 조약돌 같고, 또 어떨 때는 바윗덩어리 같다. 조약돌이던 바윗덩어리던 돌은 돌이니까 맞으면 아프다. 상처도 남는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처럼, 받은 복을 헤아리며, 감사하고,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서  '감사 일기'를  쓰곤 했다. 평소보다 더 손가락에 힘을 주어가며 꾹꾹 눌러서 썼다. 결의에 가득 찬 글씨로 일기장을 채워나갔다. 어느 날은 아무리 감사한 것을 끄집어내려고 해도 도저히 감사할 것이 없어서 '안 죽고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쓰고 펑펑 울었던 날도 있다. 그러나 삶이 허락한 다양한 도전과 훈련을 견뎌내기 위한 '꾸준한 감사의 습관'이 되었기에 지금은 나의 마음을 툭 치기만 해도 무엇이 감사한지 쉽게 말할 수 있다.  


오늘의 글은 '이번 주에 내가 받은 복 열 가지'를 써 보면서 끝맺음해야겠다.


1. 시원한 물을 언제든지 마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약 7억 8천5백만 명의 사람들이 아무리 목이 말라도 기본적인 식수조차 얻지 못한다고 하네요. 그 7억 8천5백만 명의 사람들에게는 건강한 식수가 제공되는 날이 하루속히 오길 기도할게요. 


2. 지금 냉장고를 열었을 때, 제가 좋아하는 달걀과, 아들이 좋아하는 우유와, 딸이 좋아하는 오렌지와, 남편이 좋아하는 소고기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얼마 전 책에서 전 세계에는 8억 2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하는 것을 읽었어요. 그 8억 2천만 명 안에 제 딸과 아들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분들의 불행에 제가 감사하는 것이 어쩐지 잔인하게 느껴지는데 그래도 감사는 해야 할 것 같아요. 


3. 이번 주에는 지자체에서 스타트업 회사에 사무실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에 우리 회사가 서류 통과를 했습니다. 아직 발표평가가 남아있지만, 그래도  아예 서류에서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사무실을 지원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로 돈 들어갈 일만 많은 신생 스타트업에게 사무실 지원은 마른땅에 오아시스 같은 반가운 소식이거든요. 


4. 어제, 내가 참 좋아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어요. 화가이자 에세이스트인 남편이 이번에 그림 산문집을 냈다고, 다음 주에 북 콘서트에 와줄 수 있냐며 참으로 반가운 초대를 해주었습니다. 단숨에 그 책을 주문하고, 어서 배송되기를 다렸어요. 오늘 오전에 그 책이 도착했어요. 참 빠르기도 하지요. 책에서 나는 새 종이 냄새를 맡으며, 책장을 스르르 넘겼어요. 글과 그림이 '어서 나를 읽으세요..' 하며 유혹합니다. 친구에게, 친구의 남편에게, 출판사에게, 온라인 서점에, 그리고 택배 아저씨께 감사합니다. 


5. 저는 2주에 한 번씩 꽃을 받아보는 '꽃 구독'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네요. 오늘은 꽃이 찾아오는 격주 목요일입니다. 오늘도 종이 박스 안에 분홍색 포장지에 싸인 예쁜 꽃들이 도착했어요. 아름답고 싱싱한 꽃과 어울리게 하려고 한껏 어수선해진 탁자를 말끔하게 정리했어요. 속이 시원합니다. 저에게  꽃 행복을 주시는 양재 꽃 시장 사장님께 감사합니다. 


6. 어제는 색다른 방식으로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대성공해서 감사합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남편과 아이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된장찌개를 맵싹하게 끓여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제는 용기 내어 고춧가루를 두 큰 술 투척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매울까 봐 걱정되어 꿀도 반 스푼 넣어주었지요. 은근히 된장찌개 맛있게 끓이기 어렵던데, 어제는 모두 가족 모두 만족한 듯 보여, 기분이 좋았습니다. 점점 주부 9단이 되어가서 감사합니다.      


7. 오늘 오전에 주차를 하다 주차 기둥에 차를 박았습니다. 부딪힐 때 났던 소리에 비해 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주 작은 스크래치는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차가 오래되어 이미 이곳저곳 스크래치 난 상태라 그렇게 가슴이 한 귀퉁이가 쓸쓸해지거나, 쓰라리지 않습니다. 오래된 나의 자동차가 꼭 오래된 어 더욱 편한 친구 같아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오래된 사이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겠지만요. 안전 운전하겠습니다.


8. 요즘 하루에 한편씩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방치해 두었던 블로그에 글이 성실하게 올라가면서, 어떤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기 시작하셨어요. 사진은 딱 하나밖에 없고 긴 문장으로 이루어진,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는 분이 계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도 그분의 블로그에 방문을 해서 응원의 댓글을 쓰고 와야겠네요. 낯가림 심한 저에게 먼저 다가와 주신 익명의 블로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곧 찾아뵐게요. 


9. 드디어 일곱 살 아들이 저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책을 사주어도, 거들떠도 안 보던 아들이 드디어 책을 거들떠보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세계 나라 사전'입니다. 전 세계의 나라를 대륙별로 소개하고, 전통 음식, 전통 의상, 가옥, 인구, 통화, 시차 등이 쓰여있는 사실 위주의 책이에요. 동화책을 좋아하던 딸과는 달리 아들은 팩트 위주의 백과 사전식의 책을 좋아하네요. 동화든, 백과사전이든 읽기만 해 준다면 엄마로서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10. 글을 읽는 것도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하는 저를 위한 글쓰기 플랫폼이 많아서 감사합니다. 꼭 신춘문예 당선되어 '작가'로 등단하면 좋겠지만요. 다음 브런치 스토리가 있고, 노트북이 있고, 인터넷이 되어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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