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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예라 Jan 17. 2023

헤세가 건넨 삐걱거리는 위로

헤르만 헤세, 그 이름만으로도... 

사진출처:  UnsplashAaron Burden


어느 토요일이었다. 지금은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로서는 꽤 심각한 이유로 남편과 싸웠고, 딸은 제멋대로라고 느껴져 서운했고, 아들은 성장하는 듯하다가 다시 발달이 지연된 것처럼 느껴져서 한없이 불안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버텨낼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던 그런 날이었다. 천근은 되는 듯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서점에 갔다. 당시 내 황량하고 여러 갈래 찢어진 내 마음을 알아줄, 딱 맞는 책 한 권을 고르기 위해 난 그 넓은 서점을 몇 바퀴는 돌았던 것 같다. 소설, 에세이, 잡지, 여행기, 인문학, 심지어 종교 서적에 이르기까지 1시간 넘게 돌아다녔지만 그 어느 것도 내 마음에 말을 걸어오지는 못했다. '삶에 지친 당신에게 건네는 위로'라느니 '힐링'이라느니 하는 몽글몽글한 단어는 나오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 난 아마도 그때 나에게도,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도, 심지어 열심히 책을 쓴 작가들에게까지 화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죄 없는 작가들께 '당신이 지금 내 마음의 처절함을 아시나요?'라고 말하면서 '아니요. 나는 오늘은 당신의 책을 집지도 않을 거예요. 그냥 지나가버릴 겁니다.'라는 뜻으로 고개를 홱 돌려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내 눈에 수많은 책 사이에서 '헤르만 헤세'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이내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책을 집어 들었다. 그의 책을 몇 장 넘기자 날카로워 보이는 듯한 깡마른 체격의 그의 생전 사진이 나왔다. 깔끔한 셔츠와 타이에 정장을 입고, 동그란 뿔테안경을 쓰고, 미간을 약간 찡그리고 책을 읽고 있었다. 맞아. 그의 이름 앞에는 '고단한 삶의 역경을 견뎌온'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지. 나는 그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나의 마음이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도무지 일어날 힘이 없을 것 같을 때, 그의 우울감과 앙상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을 읽었다. 비로소 '내가 너의 마음을 알아.'라는 작가의 무뚝뚝하지만 분명한 응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꺾인 나뭇가지의 삐걱거림>

꺾인 나뭇가지

벌써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매달려

바람에 메마른 노래 삐걱거린다.

잎도 다 떨어지고 껍질도 없이

벌거숭이로 색 바랜 채

너무 긴 생명과 너무 긴 죽음에 지쳐버렸네

딱딱하고 끈질기게 울리는 그 노랫소리,

반항스레 들린다.

마음속 깊이 두렵게 울려온다.

또 한여름, 또 한 겨울 동안.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집스럽고 반항적이었다. 여섯 살 무렵에는 그의 부모님이 그를 기숙 유아원으로 보내버릴 정도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아동학대에 가까운, 어떻게 보면 버려지다시피 한 그가 안쓰러웠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니면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그의 결혼생활 역시 평탄할 수 없었다. 세 번의 결혼을 할 정도로 가정에서 안정을 찾지 못했고, 신경증과 우울증 때문에 오랜 시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칼 구스타프 융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몇 년간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일평생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달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물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노벨문학상을 비롯한 괴테상과 같은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의 이름을 딴 상이 제정되기도 하는 등 그의 업적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의 빛나는 업적은 차치하고라도 그가 여든다섯의 나이에 뇌출혈로 숨지기 전까지 그의 생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이 제일 존경스럽다. 힘든 삶을 그만 끝내고자 자살하지 않아서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는 아플 동안에도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고, 정원을 가꾸었다. 여행을 했고, 삶의 지혜를 찾아 나섰고, 사랑과 우정이 무엇인지 탐구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 정직했고 충실했다. 그가 자신을 괴롭히는 병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면, 어느 토요일 우울감에 빠져 죽도록 무기력하던 한 독자는 어디에서 힘을 얻는단 말인가? 참으로 작가라는 존재는 그 힘이 거세다. 대단하다.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에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싶은 밤이다.

'고맙습니다. 잘 읽었어요. 앞으로 잘 살아내겠습니다. 또 한여름, 또 한 겨울이 갈 동안에도 여전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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