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Unsplash의Annie Spratt
나는 작은 일에도 곧잘 실망하거나 불안해하는 스타일이다. 그때마다 생각을 바꾸고, 혹은 생각을 멈추고, 글을 읽고 쓰고, 마음을 다스린다. 내 안의 불안함을 어르고 달래는 것이지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난 그런 사람이다. 인정. 그런데 이런 나를 매일 자극하는 한 아이가 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아들. 그 애는 봄에는 따사롭게, 여름에는 활기차게, 그리고 가을에는 풍성하게 자라는 듯하더니 겨울에는 다시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인다. 어린이집이 가기 싫다고 집안 곳곳으로 도망을 다닌다. 사회성과 언어에 또 발달 지연이 생긴 거 같아 마음이 무너진다. 한참 친구에게 관심을 보이나 싶더니, 이내 다시 말이 줄어들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노는 것을 즐겨한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집에 있게 하고 싶지만, 집안에서의 자극은 제한적이어서 어린이집이나 바깥으로 나가 다양한 언어,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아이에게 이로울 것이는 판단이었다. 고집을 부리는 아이에게 오랜만에 소리를 빽 지르고, 가까스로 옷을 입혔다.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어린이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이에게 '아까 엄마가 소리 질러서 미안해. 즐겁게 지내다가 우리 오후에 만나자. 응?' 하고 말했다. 아들은 두 눈을 꼭 감고 입은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해서 대답하지 않는 줄 알았더니, 그르렁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잠들었나 보다. 나는 이렇게 날마다 미안해하고, 걱정하고, 사과한다.
그러고 보면, 마흔이 넘은 나와 남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나는 거의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서 크는 까다롭지 않은 기질의 아이였고 남편은 매사에 심통이 가득 차 있었던 어린이였다. 나는 착한 아이로 자라며 억울함, 하고 싶은 말, 화를 스스로 삭이며 자랐고, 남편은 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커서 어머니가 만사를 참고 사시도록 만들었다. 어른의 말씀에 순종하던 나는 말 안 듣는 아들이 너무 힘겹다. 그러나 사사건건 반항하던 남편은 아들을 너그럽게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모든 상황을 잘 넘긴다. 나와 남편을 보아도 기질에 있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나와 다를 뿐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와 기질이 다른 아이들을 키우며 적지 않게 당황하고, 걱정하고, 우왕좌왕한다. 가끔은 내 마음이 꼭 한겨울에 초록색 이파리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 한 그루처럼 남루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내 안에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실한 열매를 맺을 생명이 펄펄 살아 있음을 떠올리기로 했다. 현재의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어린이집에 가네, 안가네, 옷을 입네 안 입네, 목도리랑 모자는 죽어도 하기 싫네, 그렇게 밖에 나가면 너 얼어 죽네 어쩌네 하며 끝도 없어 보이는 실랑이를 벌인다. '도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이래?' 하며 고함을 지르는 무식한(?) 엄마이고, 엄마가 힘겹게 신겨준 양말을 다시 벗어던져버려 엄마의 화를 돋우는 어리석은 아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나의 생각을 바꾸어 상상을 해본다.
상상 속에 나는 사랑이 많고, 품위 있게 말하고, 여유 있게 생각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람이다. 미래의 아들은 자신의 속도에 맞춰 성장하여 마침내 자신이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일들을 차분하게 해낸다. 물론 때때로 하기 싫은 일도 인내하며 감당해 낼 수 있는 마음이 넓은 청년이다. 아름답게 성장할 나와 너의 모습을 기대하며 다시 일어선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폐까지 들이마시며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해 본다. 이 하루가 쌓이고 쌓여 나의 정원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를, 향기 가득한 꽃이 피어 예쁜 나비가 날아들고, 어린아이들이 나비를 따라다니며 까르르 웃는 곳이 되기를 바라본다.
오늘 정원이 황량하다 해도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상상 속에서 벌써 존재한다. 꽃밭에는 생명이 살아 숨 쉰다. 여기에는 연녹색 상추가, 저기에는 흥겨워하는 완두가, 저쪽에는 딸기가 자랄 것이다.
-헤르만 헤세, '정원에서' 중에서-